친 서방 노선엔 큰 변화 없을 듯|「파이잘」 사후의 「사우디아라비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파이잘」왕의 죽음은 우선 석유 가격과 중동 문제가 앞으로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에 관심을 갖게 한다. 그가 73년 석유 파동을 주도했고 「아랍」-「이스라엘」 전쟁에서 「아랍」 세계에 대한 재정 지원을 도맡아 큰 영향력을 행사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파이잘」왕은 온건한 태도를 지키며 과격한 「아랍」 민족주의를 견제, 중동의 안전판으로서 결정적인 역할을 맡아왔다. 이런 뜻에서 그의 죽음은 우연히 「키신저」 미 국무장관의 중동 협상 실패와 때를 같이했다는데서 「막연한」 불안감을 자아내게 한다.
막연한 불안감이란 「파이잘」 왕 같은 강렬한 개인적 정치 역량을 새로 등장한 「사우디아라비아」 집권층으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에서 비롯된다. 그가 암살된 동기가 발표된 것처럼 「정신착란자」에 의한 우연이었다면 일단 「사우디아라비아」 정책 노선은 당분간 큰 격동 없이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평가의 이유로서는 그의 후계자 계승이 「아랍」 세계의 고질적인 족벌 안의 권력투쟁 없이 재빨리 이루어진 사실을 들 수 있다. 「할리드」의 전격적인 세습은 「파이잘」왕이 생전에 다져놓은 질서에 따라 진행됐으므로 당장 권력 투쟁에 따른 혼란 가능성은 배제된다.
이는 지금까지 유지되어온 「파이잘」의 형제인 「할리드」 제1부수상, 「파드」제2부수상 겸 내상, 「술탄」 국방상 등의 통치 구조가 급격히 바뀔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을 전제로 한 전망이다.
새로 즉위한 「할리드」 국왕이 여지껏 외부 세계에 두드러지지 않은 전통적인 보수주의자라는 점, 「파이잘」 왕의 정책 결정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해온 「파드」 내상이 계속 「사우디」 왕정의 막후 실력자로 활동하리라는 평가는 종래와 마찬가지로 친 서구적인 색채를 지닌 「아랍」 세계의 「리더」로 계속 남아 있으리라는 예측을 가능하게 한다.
다만 「파이잘」왕이 강력한 개인 지도력을 행사했던데 반해 「할리드」 신왕이 전 왕과 같은 권력을 장악할 수 있을는지는 의문이다. 「아랍」·「이스라엘」 분쟁에서 「파이잘」 왕이 취한 적극적인 재정적 지원 등의 태도는 「사우디아라비아」 전체의 의도였다기 보다는 그의 개인적인 반「이스라엘」감정이 크게 작용했다는게 통설이었으므로 새로운 집권자들의 개인 성향에 따라 다소 영향을 받을 것이다.
「아랍」 세계 친미 세력의 대표였던 그가 석유 가격 인상·금수 조처를 주도했던 것도 실은 미국의 대 「이스라엘」 원조에 대한 반발이었다. 그러나 최근 석유 가격 인하를 그가 주장하고 나선 이면에는 친 서구 경향을 등 질 수 없다는 사실도 작용했다. 석유 가격 문제는 수급에 따른 경제적 요인에서 비롯된데다 새 집권층에 본질적 변화가 없어 전 왕의 정책이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이번 「파이잘」왕의 죽음이 국내 정치의 갈등에서 연유되었다는 증거는 아직 없다. 「파이잘」 왕 치하의 「사우디아라비아」의 정정은 안정되어 있었지만 내정 개혁을 요구하는 군·관·석유 업계의 진보파 「인텔리」층과 보수파인 왕족·종교 세력간의 대립이 있어 왔다.
「파이잘」왕 스스로 개혁주의자면서도 「파드」 내상, 「술탄」 국방상의 지지를 받아 「바트」 당원·「나세르」 주의자·공산 세력 등을 거세해왔다.
석유가 인상으로 인한 「사우디아라비아」의 갑작스러운 치부가 국내 정치에 격심한 충격을 주었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별로 외부의 주목을 끌지 못했지만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 충격은 근본적으로 봉건적 상태에 머물러 있는 사회에 엄청난 양의 「오일달러」 인구 8백만 명에 연간 2백50억「달러」)가 몰려듦으로써 날카롭게 부각된 빈부 격차와 초근대적 경제개 발 작업이 가져온 국민들의 정치·교육 수준의 상승에서 연유되고 있다.
「코란」 이외에 헌법은 없으며 의회도 없고 궁신들의 절대 다수가 왕족이다. 아직까지 참수형이나 돌로 쳐 죽이는 것과 같은 원시적인 형벌이 실시되고 있다.
「파이잘」 왕은 이와 같은 사회의 불균형 상태에서 개혁의 바람이 아래로부터 일어날 경우에 대비, 강력한 군대를 키워 왔지만 이들 역시 외국 교육을 통해 현대식 장비와 행정 방식을 도입함으로써 「파이잘」식 보수주의에 잠정적 도전자로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아랍」 학자들 중에는 「파이잘」이 직면한 가장 큰 위험은 「나세르」형의 군부 반란이라고 지적한바 있다.
이와 같은 개혁의 잠재력은 「파이잘」이 갑자기 암살됨으로써 예상보다 빨리 표면으로 나타날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김동수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