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와 현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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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법령에 의해 지도하고, 형벌에 의해 규제하면 백성들은 형벌만 면하려고 무슨 짓을 하든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도덕에 의해 지도하고 예에 의해 규제하면 도덕적 수치심을 갖고 더 나아가 바른 사람이 된다』고 공자는 말했다. 「덕의 정치」와 「인의 인륜 관계」를 강조함으로써 거의 2천년 동안 동양인들의 사상사를 지배하였던 공자는 「대성지성」으로 크게 추앙되었으나 이제 그의 가르침과 그의 권위가 수난을 겪는 시대가 되었다.
더군다나 그의 모국인 중국 대륙에서조차 공자는 근래 떠들썩한 「비림비공」 운동의 함성 속에서 『자본주의의 앞잡이』가 되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적』이라고까지 폄하 되고 있다. 그가 창시한 유교는 또 근대 이후 서세동진의 흐름에 밀려 빛을 잃어 왔다. 과학기술을 앞세운 서양 문명의 위세에 눌려 동양 문명의 기축을 이루었던 공자의 사상은 동양인들에게서조차 외면되곤 하는 처지에 빠지게 되어 왔다. 현대 한국인들에게 있어서도 그의 이름은 이제 매력을 잃은지 오래며, 유학 또한 진부하고 고루한 학설의 대명사처럼 되어 왔다.
2천년 이상이나 너무도 오랜 기간 동안 우리 조상들이 받들고, 모셔 왔다는 그런 사실 때문에 무엇인가 낡고 고루하다는 느낌이 너무 강한 때문이었을까. 상투 틀고 갓 쓰고 장죽을 물고 팔자 걸음을 걷는 유학자의 모습이 너무나도 낯설고 답답해서이었을까. 아니면 현실적으로 유학을 정치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조의 퇴영과 형식주의와 파쟁과 그 결과라 할 수 있는 비극적 망국을 너무 가깝게 체험한 때문이었을까.
아뭏든 철저한 현실주의자였던 공자의 「이미지」는 이 같은 「현실」의 좌절로 해서 손상되어 왔던 것이다. 그는 일시적인 현실의 좌절, 그가 만든 것이 아닌 「현실」에 대해서 책임을 떠맡고 그의 본질이 아닌 말절적 의례의 격식 때문에 비난을 받아야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시대를 슬기롭게 살아가겠다는 사람들에게 있어 공자를 새롭게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은 우선 이 같은 오해를 없애면서 아울러 그의 근본사 상을 재평가하는데서부터 찾아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진리를 사랑한 점에서 위대한 선비였다. 그는 추상적인 것이거나 환상적인 것, 더욱이 내세적인 것이 아닌 도덕적 이상 사회를 현실에 구현하고자 했던 행동인 이었음을 다시 보아야 한다.
『아침나절 도에 대해서 들을 수 있으면 저녁에 죽는데도 한이 없다』고 얘기한 바도 있을 정도다.
그에게 있어 진리를 탐구하는 것, 그것은 바로 현실 세계를 바르게 하는 것이었다. 그에게 있어 『정은 정』이었다. 그것은 덕치이고 정의가 근본이 되는 정치였다.
『정치가의 자세가 바르면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행해지고 정치가의 자세가 바르지 않으면 아무리 명령해도 백성은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 바로 그의 신념이었다.
덕과 정의와 신과 예를 합한 「인」을 인륜 관계의 근본으로 제시했던 그의 뜻은 분명하다.
춘추시대라는 난세에 살면서 천하를 바로 잡으려고 경륜을 폈던 공자가 결국 터득한 것은『사람과 사람의 올바른 관계』였다. 도가 사라진지 오랜 난세에 있어서도 현실적 삶을 긍정하면서, 동시에 비속하지 않은 의연한 자세를 끄는 「충서」와 「지천명」이라 하여 도덕적 인생의 모범으로 보여 주었던 것이다.
실로 동서고금을 물론하고 도덕에 기반을 두지 않은 사회는 언제나 불화와 부조리가 풍미하여 그칠 줄을 모른다. 사회의 윤리 정신이 고갈되면 백성의 행복이 보장될 리 없다.
민주주의 사회를 구현하려고 몸부림치고 있는 오늘의 한국에 살면서 2천5백26주년의 탄신을 맞는 난세에 살았던 공자를 생각하는 것은 결코 의미 없는 일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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