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방콕」에 정착한 전 영화감독 이경손 씨(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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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1획야의 항해 끝에 이씨가 도착한 곳은「방콕」의 강 부두였다. 난생 처음 보는 원색의 야자수, 푹푹 찌는 더위, 까무잡잡한 피부에 새카만 눈동자의 사람들-이 모두가 신기하고 낯설기만 했다. 도망자의 신세가 아니라면 여행의 정취라도 느낄 수 있는 풍경이었지만 이씨는 종내 불안하기만 했다. 상해만 하더라도 외로우면 만나서 이야기할 수 있는 동포가 있었다.

<여 제자와의 스캔들로 사직>
그러나「방콕」은 그야말로 사해고도.
믿는 데라고는 그를 데리고 온 중국인 대학생 남과 그 가족뿐이었다. 요행히 도착한지 며칠 되지 않아 이씨는 남의 주선으로「방콕」화교중학 영어교사 자리를 구했다.
중국 국민당 남양지부가 경영하던 이 학교는 학생 6백여 명밖에 안 되는 소규모였지만 교장이 국민당 간부였고 대부분의 교사와 학생들이 항일사상이 투철해 우선 이씨는 정신적인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학교의 재정 형편이 쪼들려 교사들은 별도의 월급을 받지 못하고 학교당국이 제공하는 보잘것없는 숙식비에 의존하는 가난한 생활을 했다. 가끔 교장이 돈이 조금 생기면 교사들에게 1원(l「달러」50「센트」)씩 나누어주면서 이발을 하든지 영화구경이나 가라고 권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때문에 이씨는 밤에 두 시간씩 영어 가정교사를 해 용돈을 벌어 썼다. 그의 지난 과거에 비하면 퍽 단조로운 생활이기는 했으나 교편생활에 재미를 붙이려고 애를 썼다. 그래서 그는 방과후에도 틈만 나면 문예반 학생들을 모아놓고 문학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학생들도 이씨를 무척 따랐다. 그 중「총각 선생님」의 해박한 영화·연극강의에 흠뻑 빠진 한 졸업반 여학생의 이씨에 대한 정성은 거의 광적이었다. 이씨는 처음에는 이 여학생의 호의를 선의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것이 화를 몰고 온 것이다. 곳과 때를 가리지 않고 찾아오는 이 여학생의 거동이 마침내 교내에「스승과 제자간의 연애」라는「스캔들」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교무회의에서 정식으로 이 문제가 거론되고 학생들이 수군거림에 따라 이씨는 사직할 수 밖에 없었다. 교장선생님만은 이씨의 본심을 이해했음인지「말레이지아」와의 국경지방에 있는 화교중학에 대신 이씨를 위해 영어 교사자리를 구해주었다. 이씨는 옮겨온 학교에서 1년간 근무했다. 그러나 차차 시간이 지나자 한심한 생각이 그를 사로잡았다. 태국까지 흘러온 목적이 무엇이었나를 다시금 생각해봤다. 그는 자신이 분명히 타국의 소읍에서 영어교사노릇에 만족하기 위해 온 것은 아님을 알고 있었다.
깊은 좌절감에 빠진 그는「방콕」으로 되돌아왔다. 오자마자 인도「캘커타」의 국제대학 (시인「타고르」가 창설)에「고학으로 철학을 전공하고 싶다」는 편지를 냈다. 그러나 그곳의 회답은 등록금은 면제해줄 수 있으나 숙식을 해결할 만큼의 장학금은 지급할 수 없으며「캘커타」란 고학을 하기에는 부적당한 곳이라는 설명이었다. 이어 그는「이탈리아」의 대학에도 비슷한 편지를 냈다. 그곳에서는 회답조차 없었다.

<원양기선회사에 구직호소>
다시금 실의에 빠진 그는 어떻게 해서든 이 따분한 태국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궁리한 끝에 그가 찾아간 곳이 어느 원양기선회사였다. 그는 무턱대고 자신이 한국에서 상선학교를 다녔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수부고 타수고「보이」고 간에 아무거라도 좋으니 채용해달라고 졸랐다. 회사측은 도와주고 싶으나 그들 배의 선적이「싱가포르」이기 때문에 해원증기가 「방콕」에서는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이렇게 방황하고 있을 무렵 중국인 친구 한 명이 같이 화보사를 창설해 보자고 제안해 왔다. 차라리 한군데 정신을 집중하는 곳이 있으면 정신적인 고통이 덜 하겠다 싶어 이씨는 시골학교에서 교사·가정교사 노릇을 하여 인도유학 여비조로 푼푼이 모아둔 돈을 몽땅 털어「격계화보사」를 창설했다. 이 화보사는 직접 화보를 인쇄하는 것이 아니고 중·일·영·미·독·이 등지에 화보를 주문, 수집한 다음 사진설명을 변역·첨부해 2백여 구독자들에게 열람시킨 다음 다시 반환해 가는 방식으로 경영했다.
이씨는 그때 알지도 못하는 독어·이태리어를 어떻게 번역했는지 지금 생각하면 한강을 배를 타고 건너온 건지 헤엄쳐온 건지 모를 지경이라고 한다. 이런 속사정도 모르고 당시 화교 문예계에서는 이씨를 기재로 생각했다. 아뭏든 이일을 계기로 이씨는「방콕」의 문화계에 일약 명물이 되었고 친구도 많이 만들었다. 친구래야 주로 화교신문사의 기자들이었다. 이들 덕분에 이씨는 한때 포기했던 희곡을 신문에 발표하여 원고료를 받아 생활도 꾸려나갈 수 있었다.

<「태문매일」여기자와 교제>
다시 예술인으로「방콕」에 자리를 잡은 이씨는 차차 활동의 폭을 넓혀갔다. 그는 자신의 영어실력을「테스트」해볼 겸「런던」의 영화잡지사에 영문희곡을 투고했는데 이것이 게재되자「버나드·쇼」회에서 동남아지부를 맡아달라는 청탁이 왔다.
이씨는 지부일을 맡을 생각은 없으며 연극의 본고장인「런던」에 가 공부를 할 수 있는 길을 주선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런던」의「버나드·쇼」회는 세계 도처에 지부를 두고 연극을 공연하는 것이 주목적이므로 이씨의 부탁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회답해 왔다.
영국행을 포기한 이씨는 어느 날 중국인 친구와 함께「태문매일신문사」에 놀러갔다가 사장비서 겸 기자로 일하고 있는 태국처녀 한 명을 소개받았다. 이 처녀가 바로 이씨의 현 부인「부라영」여사로서 그녀를 알고부터 이씨의 생활에는 큰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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