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20)그 입지의 현장을 가다―「방콕」에 정착한 전 영화감독 이경손씨(3)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일본인이 경영하는 「조선키네마사」에서 『해의 비곡』 『운영전』 등을 감독, 영화 제작 기술을 익힌 이씨는 선배인 윤백남을 업고 서울로 올라와 독자적인 작품 활동을 했다. 이때부터 3년 동안 그는 나운규와 한방에서 숙식을 하며 연예 활동을 계속했다.
의욕만 넘쳤을 뿐 자체 내 자금 조달 능력이 없던 당시의 영화인으로서 이씨는 그때그때 전주가 나타나면 윤백남·조일제·나운규 등과 「파트너」가 되어 전창근·윤봉춘·정기탁·신일선 등의 배우들을 데리고 근근 영화 제작의 명맥을 이어갔다.
그러다 보니 생활은 궁핍할대로 궁핍해 답배 한 갑 사 피우는 것도 주머니 사정을 다시 한번 확인해야 했다.

<호구지책 위해 다방도 경영>
그 당시 영화 한편을 제작할 경우 명목상 급료는 감독인 이씨가 1백50원, 기사가 90원, 기본 배우가 30원이었다. 단 나운규만은 다른 배우들보다 5원내지 10원씩 더 받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씨는 급료를 한번도 제대로 다 받아 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전주들이 땅 팔아 영화 하겠다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기껏 영화가 완성되어도 흥행에 실패하면 어디다 『월급 내 놓으라』고 말할 데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호구지책으로 다방을 경영하기도 하고 「프리랜서」로 방송국에서 연속 입체 낭독을 하기도 했다(유주현씨의 소설 『조선총독부』를 보면 이씨가 우리 나라에서 최초로 다방을 경영한 사람으로 되어 있다).
이 같은 곤경 속에서 이씨는 영화 『심청전』 『개척자』 『장한몽』 『산채왕』 『춘희』 『봉황의 면류관』과 희곡 『동도』 『느티나무 아래서』 등을 발표했는데 이 과정에서 있었던 무성 영화 시대의 일화들은 이미 여러 사람들의 입이나 글을 통해 널리 알려졌을 것이며 굳이 덧붙여 말하지 않겠다고 했다.
다만 인상적인 것이 있다면 희곡 『동도』를 당시 신극 운동 단체 「토월회」의 중심 「멤버」였던 박승희가 가수 윤심덕을 여주인공으로 내세워 광무대에서 공연, 크게 「히트」했던 것과 나운규의 조카인 진옥과 맺은 첫사랑이 비련으로 끝났던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장한몽』 촬영이 중간쯤 이르렀을 때 이수일 역을 맡은 주연 남우 주삼손(일본인)이 달아나는 바람에 궁여지책으로 소설가 심훈을 대역으로 썼던 일은 지금도 고소를 자아내게 한다고. 영화 촬영이란 「시퀀스」(이야기의 전후 연결)와 관계없이 배경 위주로 촬영을 하기 때문에 한 영화에 두 명의 이수일이 등장하는 「난센스」를 빚었던 것. 심훈은 주삼손보다 몸집이 컸다.
때문에 영화를 만들어 놓고 보니 몸 작은 이수일이 심순애를 대동 강변으로 끌고 가면 몸집 큰 이수일이 발길질을 하고 문을 두드리는 이수일과 심순애 곁에 앉아 있는 이수일의 얼굴이 달랐던 것이다.
그가 상해로의 망명을 생각한 것은 소설 『백의인』을 조선일보에 연재하면서부터. 이 소설은 조선일보 기자였던 김을한이 곤궁한 이씨의 처지를 생각해서 주선해 준 것. 이씨는 평소 영화 운동이다, 선극 운동이다 하고 돌아다녔지만 시간이 갈수록 퇴폐적으로 되어 가는 연예계의 분위기에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
나운규만 하더라도 비록 영화 『아리랑』으로 불세출의 명배우가 되었지만 매일 할일 없이 기생방에서 노닥거리는 생활을 했으며 대부분의 배우가 비슷한 생활을 했다.

<연예계의 퇴폐에 회의 느껴>
이씨는 『그러면서도 그때 내가 왜 그렇게 나운규를 좋아했는지 모르겠다』면서 안경을 벗으며 웃었다.
이씨는 이 같은 분위기에서 탈출하고 싶었다. 서울·부산에는 일본 집들이 중심가를 메우고 초가집들은 산 아래로 밀려나고 식당의 김치가 「다꾸앙」으로 바뀌어 가는 판에 그는 차라리 눈물 쥐어짜는 애정물보다는 관부연락선 선창에 죽은 생선처럼 늘어서 일본으로 석탄 파러 가는 흰옷들, 그 어느 곳에나 흩어져 있는 오막살이, 두만강의 얼음판을 걷는 흰옷 등을 표현해 보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백의인』에서 전형적인 한국의 부호 토족의 몰락상을 그렸다. 땅 팔아서 공부한 장남은 신문기자가 되어 독립운동을 하다 감옥으로 가고 그 동생은 중학밖에 못 나와 이리저리 전전하다 노동자로 전락하고 그 누이동생은 타락의 길을 걷고, 그리고 그의 어머니는 기독교로 개종해서 하나님의 복만 빌고 있고―이런 줄거리였다. 그러나 결국 『백의인』은 실패였다. 문단의 반응은 물론 독자들의 반응도 별로 없었다.
이씨는 지금 생각하니 그때 지나치게 주제의 문제의식에만 집착한 나머지 소설의 흥미적인 요소를 무시해 버렸기 때문에 실패한 것 같다고 한다.
아무튼 그는 이 소설로 「불령선인」이란 낙인이 찍혀 종로 경찰서 애꾸눈 형사의 요시찰 대상이 되었다.
예술인으로서의 좌절감·피압박 민족으로서의 설움, 그리고 틈만 있으면 불러들여 아글거리는 일본인 형사의 심문-이 모든 것이 귀찮기만 했다.

<「백의인」 때문에 일경이 감시>
이 무렵 『봉황의 면류관』에서 주연을 했던 정기탁으로부터 상해에서 편지가 왔다. 정기탁은 『장한몽』에서 이수일의 가슴에 불을 지르는 신사역을 맡았었는데 배재고보 시절에는 야구 선수를 한 평양 갑부의 아들이었다.
정기탁의 편지 내용인즉 지금 『상해야 잘 있거라』를 만들 작정인데 이씨를 꼭 감독으로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미리 평양 자기 아버지에게 연락해 놓았으니 여비를 받아 가지고 곧 상해로 오라는 것이었다.
상해는 임시정부가 있는 곳. 수많은 조선의 열혈 청년들이 목숨을 걸고 건너간 곳이기도 했다. 이미 두번이나 상해로의 탈출을 기도했다가 실패한 이씨로서는 더 이상 주저할 것이 없었다. 까다로운 여권 발급 과정도 인내로써 참았다. 이씨의 결심이 굳어졌을 무렵 마지막으로 그를 찾아온 것은 나운규였다. 나운규는 『아리랑』의 후속타로 낼 작품의 각본을 부탁해 왔다.
이씨는 20일 동안 씨름한 끝에 각본 『잘있거라』를 나운규에게 넘겨주고 「나가사끼」를 거쳐 상해로 가기 위해 아무도 모르게 부산으로 내려갔다.
이씨가 관부연락선에 몸을 싣고 24세의 젊은 나이로 고국을 떠나던 바로 그날, 서울의 각 신문에서는 『이경손은 「잘 있거라」라는 원작을 나운규에게 주고 정말 잘있거라를 불렀다』는 기사가 일제히 보도되었다. 그리고 그날이 이씨가 고국 땅을 밟은 마지막날이 되고 말았다.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