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년의 국제 동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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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이 국제 정세의 흐름이며 일파만파의 영향을 주는 것이 국제 관계이기도하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거기에는 일정한 상수와 변수의 구별이 있기 마련인 것이므로 우리는 그 차이를 정확히 파악하면서 침착하게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서의 우리의 나아갈 길을 택해야 하는 것이다.
새해 국제 관계의 주축은 여전히 미·중공·소련을 중심으로 빚어지는 3극 체제 안에서의 움직임일 것임에 틀림이 없다. 이들 3극간의 상호 관계가 어떻게 달라질 것인지는 장차 일어날 구체적인 상황의 변화에 달려 있는 것이지만, 확실한 것은 미국과 중공이 더욱 친근해지는 추세를 보일 것이라는 전망이다.
이미 권좌에서 물러나기는 했지만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의 방중 후에 트이기 시작한 양국간 교역 관계의 급진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추진력을 얻게된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최근 중공이 미국뿐만 아니라 일본·호주·「캐나다」등 기타 서방 국가들과도 경제 관계를 깊이하고 있는 사태는 표면상의 과격한 구호와는 달리 중공이 평화 정책을 계속 추구해야 할 자체의 필요성을 반영하는 것으로 봄이 옳을 것이다.
다만 중공이 이 이상의 급격한 정책 전환을 하지 못하는 한가지 이유는 그 내정이 불안정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과감한 신 정책의 전개가 어렵다는데 있다. 여명이 얼마 남지 않은 모택동의 후계자는 아직도 결정된 것 같지 않으며, 과도기의 안전판적 조정 역할을 맡아온 주은래 역시 병중에 있다. 따라서 모 사후에는 격심한 권력 투쟁이 예상되는 만큼, 그 어느 누구도 엉거주춤하여 현상 유지 이상의 행동을 감히 취하지 못하는 것이 중공의 실정인 것이다.
소련 역시 위험적인 행동을 개시할 의향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 자체의 영토와 또 그 세력권에 속하는 나라들에 대하여 서방측이 먼저 개입하지 않는 한, 「스탈린」 시대의 냉전 체제를 완전히 탈피한 후 「흐루시초프」의 공존 노선을 따른 지도 10여년을 헤아리는 지금, 소련으로서는 자체의 경제 개발에 전념하는 일보다도 더 급한 일이 없는 것이다. 이래서 이들 세 나라를 중심으로 한 3극 체제는 큰 변동 없이 1975년 국제 정세의 조류를 이끌어나갈 기본 골격을 형성할 것이다.
다만 여기 심각한 갈등 요인으로 지목해야 할 것은 선진국과 후진국 사이의 관계가 더욱 첨예화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사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 다름 아닌 식량 문제이기 때문이다.
지구상의 인구의 거의 3분의 2 이상을 차지하는 후진국들의 기아 해방과 경제 발전을 위해 선진국들의 현명한 판단과 장기적인 안목에선 협조가 없다면 문제는 폭발적인 불안 요인을 가중케 할 것이다. 다만 이 사실은 장기적인 추세의 현세화가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음을 뜻하는 것이며, 그렇다고 어떤 급격한 변화가 있으리라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더 큰 문제는 제3의 장기적 현상, 즉 세계 도처에서 불붙고 있는 민족주의가 어디서 어떻게 폭발하게 될지 모른다는데 있다. 이성을 초월한 감정이 지배하기 쉬운 민족주의는 사실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그 위력은 더 해져가고 있는 것이 오늘의 국제적 상황이다. 작게는 북 아일랜드의 분쟁에서 시작하여 크게는 이스라엘 대 아랍간의 중동 문제에 이르기까지 그 양상은 다채로우나 무서운 폭발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된 성격을 가지고 있다. 특히 중동은 석유 파동과 관련되어 미국의 무력 개입설 마저 나돌고 있는 만큼, 우리의 비상한 관심을 끌지 않을 수 없는 지역이다.
우리는 여기서 새삼스럽게 외교의 냉혹한 일면을 보게 된다. 의례와 교섭과 논리가 지배하는 외교도 일정한 단계에 다다르면 실력과 무력의 지배로 바뀔 수 있다는 고전적 개념이 결코 완전히 무효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중동에서 다시 한번 확증해야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장기적인 상수를 국제 정세 속에서 관찰하면서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변수들에 어떻게 대처해나가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명분과 형식보다는 좀더 실리를 찾는 방도를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 그 첫째 명제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대 유엔 외교와 대 중립국 외교에 있어서도 새해에는 그 접근 방법에 신중하면서도 획기적인 전환의 가능성이 없는가를 미리미리 검토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우리는 더 원대한 계획 하에 소련 및 중공과의 관계, 그리고 북한과의 새로운 관계를 찾아보는데 온갖 노력을 집중하고, 그 가능성을 찾는데 박차를 가했으면 한다.
부족한 자원과 제한된 국력 밖에 못 가졌을 뿐만 아니라 더욱이 지정학적으로도 매우 미묘한 위치에 놓여 있는 우리는 매사에 말못할 제약을 받게 될 것은 불가피한 현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국제 정세의 흐름에 피동적으로 몸을 내맡기고만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지난 수년간 우리가 음으로 양으로 경주하였던 노력을 더욱 증대하는 한편, 국가 이익의 추구를 위해서는 공산 국가들과도 새로운 관계를 전개하는데, 좀더 적극성을 보이지 않으면 안될 국면이 조성되고 있는 것이다. 북한과의 관계에 대하여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속으로 오므라들고 극히 호전적인 언사로 선전 공세를 펴는 북한에 대하여서도 우리는 함께 토론하고 같이 생각하는 자리에서 더 자주 만나도록 설득하는 탄력성 있는 접근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적화 통일이란 도저히 있을 수 없고, 그렇다고 평화 통일도 당분간은 안된다는 것이 대부분의 인사의 견해요, 또 객관 정세라 한다면 그와 같은 현실에 바탕을 둔, 과감하고 현실적인 교섭을 진지하게 전개하는 당위성을 살리는 방향으로 노력하는 것이 민족의 진로이다.
일본에 대하여도 우리는 다시 한번 곰곰 생각할 필요가 있다. 김대중씨 사건이 일본인으로 하여금 『한국을 다시 한번 새롭게 보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갖게 하였다면 문세광 사건은 우리에게 같은 말을 일본에 대하여 할 수 있게 하였다. 가까운 이웃이니 만큼 우리는 새삼 국민간의 참다운 이해를 전제로 한 돈독한 우호 관계의 재정립을 서둘러야 하겠음을 뼈저리게 느끼는 것이다.
무력 충돌이 언제 터지든지 이에 대한 대비를 게을리 하지 않으면서도 우리는 주어진 여건 하에서 최대한의 이성과 실리적인 교섭이 그 본령을 다할 수 있도록 외교 관계를 확대해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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