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민복기 대법원장·배정현 전 대법원장 대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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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며칠 전 친구 집의 결혼식장에서 뵈었으니, 요즘은 자주 만나는군요. 반갑습니다. 배 선배님.』
『민 원장님은 언제 뵈어도 정정하십니다.』
유난히도 포근한 정초의 하오. 민복기 대법원장 (62)은 대법원 집무실에서 전 대법원장 직무 대행 배정현 변호사 (66)를 맞았다.
비록 몸을 담고 있는 곳이 조야로, 매일처럼 얼굴을 마주할 수는 없는 처지이지만 두 사람 모두 지난 30여년간의 생활이 법을 떠난 적이 없는 것이었기에 이야기는 금새 사법부 안으로 들어갔다.
(배 변호사가 경성제대 법학부의 선배이고 대법원장직도 앞서 맡았다해서 민 원장은 말머리마다 배 선배님을 잊지 않았고, 배 변호사 역시 「민원장님」이라 했다.)
『만 6년 이상 사법부 안에서만 있다 보니 스스로의 허물이나 야의 소리에 비교적 어둡습니다. 바깥이야기를 들려주십시오.』 재야의 충고를 구하는 민 원장의 말에 배 변호사는 사법부의 노고를 먼저 치하한 뒤 유신 헌법 실시 이후 어려운 시기의 책임을 강조했다.
『유신 헌법 아래서 사법부의 운영에 대한 비판도 있을 줄 아나 유신 헌법에 의해 임명된 법관은 그 헌법과 법률의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민 원장은 자신이 맡고 있는 사법부 운영의 한계를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민 원장은 『유신 전 우리 헌법은 사법부에 관한 한 세계의 최첨단을 걷고 있었어요. 당시 일부 법관들이 너무 독선적이었고 현실을 외면한 재판이 있었기에 사법부의 불신을 초래했으며 그것이 오늘날과 같이 법관에 대한 제한조치가 취해진 원인이 되었다』고 풀이, 유신 헌법의 당위성을 폈다.
처음에는 개정 헌법에 따라 법관의 임명·보직권이 행정부로 넘어간데 대한 서운함도 있었으나 다른 한편 생각하면 그 같은 조치가 취해지게 된 원인에 대해 법관 자신도 스스로 반성할 점이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고 부연 설명했다.
그러나 배 변호사는 『사법부 자체의 잘못 보다는 유신 헌법이 특수한 여건 하에서 제정되었기 때문에 결과가 그렇게 된 것』이라고 민 원장의 의견을 달리했다.
(조야의 쌍벽이랄 수 있는 두 노 법조인들은 한마디 한마디에 깊은 사려를 담았으며 한 대화가 끝난 뒤에는 서로의 의견을 음미하듯 잠시 말이 중단되곤 했다.)
이어 법관의 독립성 문제, 그리고 이에 대한 현실적인 비판 등으로 이어졌다.
▲배 변호사=미국과 같이 사법 우월적인 경지에는 못 가더라도 행정부에의 추종 인상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일부 재야 법조인들이 말하고 있습니다.
▲민 원장=(굳은 표정으로 잠시 쉬었다가) 그런 이야기가 가능하리라 생각합니다. 법관도 인간인 이상 자신의 인사권자에 대한 심리적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겠지요. 그러나 아직까지 사법부가 행정 권력에 견제되어 재판을 하거나 추종했다는 말, 또는 그런 사례를 본적이 없습니다. 』
민 원장은 약간 쉰 듯하면서도 가라앉은 어조로 아직도 사법부가 양심과 법률에 따라 공정을 잃지 않는다고 강조했으나 배 변호사는 그래도 노파심에서였는지 자유당 정권 때 법원이 그토록 심한 행정 권력 아래서도 선거 부정에 대해 20여건이나 선거 무효, 또는 당선 무효를 선언했던 의연한 용기와 의지력을 되새겼다.
근자의 법관의 판결 자세 문제로 넘어갔다. 민 원장은 『법 해석이 현실과 동떨어져서는 안 되는 것』이라는 평소의 생각을 다시 강조, 『일본에서, 또는 미국에서 이렇게 해석했으니 우리도 그에 따라야 한다는 식은 우리 현실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라 했다. 즉 국민이 심복 할 수 있는 재판은 단순한 법률 적용상의 기술이 아니라 법관의 경험과 교양이 법률 기술에 반영된 것이라고 풀어 나갔다. (민 원장은 이 대목에서 국가의 안보나 현실적인 문제 등을 직접 지적하지는 않았으나 이런 문제를 염두에 둔 듯.)
이를 받아 배 변호사는 『지나친 형식 논리에 흘러서도 안되겠지만 그렇다고 사회 현실을 지나치게 참작해 법의 기본 이론에 어긋나서도 안 될 것입니다. 그 이중성을 잘 조화시켜야 합니다』며 그의 지론을 충고로 말했다. (두 사람 모두 상대방 말의 표현 뒤에 숨은 뜻을 이해하려는 듯 몸을 가까이 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유신으로 국가의 3권-입법 사법 행정-가운데 사법부가 어떤 형태로든지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는데에서 일치했다. (일반에서, 또는 재야 법조계 일부에서 헌법에 관한 논의와 함께 사법부에 대한 동정도 이따금 있어 오던 터였기에 이에 대한 이야기는 한층 실감나게 진행됐다.)
『누구나 많은 권한을 갖고 싶어하는 것은 인정이 아닙니까. 사법부로서도 그것이 바람직한 일이지요-.』
그러나 유신 헌법에 따라 대법원의 법률에 대한 위헌 심사권이 위법 위원회로 넘어갔고, 대법원장 및 대법원 판사는 물론 일반 법관의 인사 과정에서 사법부가 관여하지 못하게 됨으로써 없어진 법관 추천 회의 (5·16전까지는 법관 회의)에 대한 아쉬움-.
배 변호사는 『더러는 폐단도 있었지만 인권 보호의 한 기능을 맡았던 적부심 제도가 폐지된 것과 재임명 절차 때 탈락된 법관의 보충은 그 산술적인 면에서는 충원이 됐지만 원숙한 중견 법관의 부족을 느끼는 듯 하다』며 그 예로 판결이 전보다 자상하지도, 친절하지도 못하다는 말이 있다고 들 (야)의 소리를 전했다.
특히 행정 기관의 잘못으로 국민이 피해를 본, 이른바 국가 상대의 손해 배상 사건, 또는 행정 소송이 무더기로 지연되고 있는데 대해 신랄히 비판, 빠른 판결을 촉구했다.
배 변호사는 『이러한 문제들이 사법 관계법령이 개정될 때 반드시 또 구체적으로 논의되어야 하며, 이는 사법권의 독립을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민 원장은 대화 처음에 자신이 말했듯, 재야의 충고에 귀를 모았다.
『제도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운영의 묘를 살리는 것이 보다 중요합니다. 성문 헌법이 없는 영국에서도 사법권의 독립은 훌륭히 이뤄지고 있지 않습니까.』
민 원장은 실제로 운영이 제도를 많이 「커버」하고 있는 사법부의 현실을 강조했다. (숱한 고언이 오갔다. 서로가 겪고 있는 현실적인 고충·소망과 함께 서로에 대한 이해도 함께 오갔다.) <기록=정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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