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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재독 산림학자 고영주 박사(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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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인부생활의 힘겨움은 그런대로 견디어낼 수 있었으나 산림십장의 절대적 권위에 복종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30∼40m씩 쭉쭉 뻗어 솟은 나무를 타고 올라가 전지할 때는 진땀이 났다. 대개 3분의 1쯤 가지를 위로 남기고 잘라내는 것을 처음에는 거의 꼭대기까지 다 잘라내 산림십장에게 호된 불벼락을 맞은 적도 있었다. 산판에서 일하는 동안은 숙식이 관비로 제공되어 이 문제만은 걱정거리가 아니었으나 막상 1년을 채우고 학부에 입학하고 나니 어려운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60% 이상 파괴된 「프라이부르크」시는 폐허가 그대로 남아 마치 유령의 도시와 같았다.

<외국인으론 첫 산림관리 연수>
독일인조차 먹을 것, 잘 곳이 모자라 갈팡질팡 하는 터에 넉넉지 못한 고국으로부터의 송구스런 송금을 받아 하루하루를 지내는 게 고역이었다. 그저 전문학교 정도로 알고 3년이면 돌아가겠다는 생각으로 왔던 고영주씨에게 다시 대학학부생활 10학년(5년), 학부수료 후의 관사훈련과정 3년 등 10년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막막한 생각만 들었다. 게다가 산판에서의 인부생활을 끝내고 학부에 갓 등록했던 56년 겨울, 고국에서 화폐개혁이 단행되어 3개월 동안 송금이 끊겼을 때는 완전한 절망상태에 빠져들기까지 했다.
마침 「크리스머스」를 전후한 때라 비록 피폐하기는 했지만 그런대로 축제「무드」에 젖어있는 독일인들 틈새에서 땡전 한푼 없는 빈털터리가 된 고영주씨는 사흘동안 하숙방에 틀어박혀 끼니를 걸렀다. 남에게 자신을 초라하게 보이는 것을 꺼렸던 고씨는 주먹만한 딱딱한 빵 한 조각을 마치 쥐가 나무토막을 갉듯이 뜯어먹으며 물로 주린 배를 달랬다. 마침 당시 「프라이부르크」에서 의학을 공부하고있던 이문호씨(현 서울대 의대 교수)가 이를 알고 1백「마르크」를 변통해주어 위기를 넘겼다. 1백「마르크」라는 거금을 손에 쥔 고씨는 그 길로 식당에 달려가 사흘동안 주린 배를 채웠으나 어찌나 포식했던지 배탈이 나 오히려 굶을 때보다 더욱 심하게 여러 날 고생해야만 했던 일도 있다.
이 같은 어려운 고비를 숱하게 겪어가면서도 그는 남에게 신세지는 일을 마다했다. 전후 혼란기라 서독정부에서 주는 장학금도 얻기 어려울 때이기는 했지만 장학금을 얻기 위해 나설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가 어렵게 공부하는 것을 딱하게 여겼던지 독일「가톨릭」종교단체에서 중국인 신부를 보내 장학금을 주겠다고 제의했으나 그런 돈이 있으면 자신보다 더 어려운 사람을 찾아보라고 일언지하에 거절했다고 고 박사는 술회하고 있다. 장학금을 받는 것이 자신의 생활신조를 속박하고 스스로를 비하하는 느낌이 들어 거절했다는게 이유였다.
어려움 속에서도 고영주씨의 면학에 대한 의지는 끈질긴 것이었다. 여느 독일 학생들도 10학기로 끝내는 게 보통인 학부과정을 그는 9학기만에 끝냈다. 산림학 부문에서의 공부는 일단 학부과정의 종료로써 끝나는 게 아니었지만 외국인에게는 더 이상 공부할 방법이 없는 게 당시까지의 통례였다.
박사과정을 거쳐 대학의 연구기관에 남으려 하더라도 누구나 일단 산림관사 연수를 3년간 수료한 뒤에라야 가능한데 이는 완전히 관비훈련이기 때문에 외국인에게는 절대로 허용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고영주씨의 경우 발군의 학업성적을 기록했던 탓인지 독일 산림사 5백년 이래 최초로 산림관사 연수가 특별 허용되었다.
3년간의 행정연수가 끝난 뒤 고영주씨는 다시 대학에 복귀했다. 10여년 동안 함께 산림학 공부를 하며 지냈던 10여명의 동창생들은 모두 산림관사로 발령 받아 뿔뿔이 흩어졌고 고씨만이 대학에 들어왔던 것이다. 외국인이기 때문에 아무리 관사가 되고싶더라도 될 수도 없었지만 좀더 공부하여 고국에 돌아가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산림통계학 분야의 활동 괄목>
박사학위를 받기까지 3년은 고초의 연속이었다. 지도교수와의 의견충돌로, 작업의 어려움으로 학업을 포기할까 하는 생각을 한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가까스로 박사학위를 받은 게 67년, 곧바로 대학연구실에 채용되었다. 이 경우 대학교수가 되기 위한 「하빌리타치온」과정이 있지만 고 박사는 처음부터 여기에 눈을 돌리지 않았다. 독일에서 구라파인에게도 좀처럼 허용 않는 교수직을 자신에게 허용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학자로서의 능력, 산림통계학 분야에서의 특수성과 업적 때문에 그의 존재는 유별나게 빛났다. 독일정부 대표로, 독일학계의 대표로 외국에서 열리는 학술회의에 쉴새 없이 참가하는가 하면 독일 산림당국의 의뢰로 연구보고서를 작성하여 귀중한 자료로서 응용되는 등 그의 활동의 폭은 다방면에 걸친 것이었다. 고 박사가 이 같은 위치에 이르기까지에는 부인 국복진 여사(50)의 뒷바라지가 대단한 힘이었다. 전남 출신의 국 여사는 8·15 해방 후 서울여의전을 졸업, 부산에서 피난생활을 하며 서독병원선에 근무하던 시절 고 박사와의 사랑이 움터 결혼하게 됐다. 55년 고 박사가 서독으로 떠난 뒤 1년을 기다려 56년에 「프라이부르크」에서 합류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두 사람은 연인의 관계에 머물렀을 뿐 아직 결혼하지 않은 사이였다.

<결혼신고법 달라 당황하기도>
국 여사 역시 학생의 신분으로 독일학술교류처(PAAD)의 장학생 자격으로 왔기 때문에 결혼이라는 것은 두 사람에게 모두 모험처럼 생각되었다. 결혼하기까지 두 연인은 같은 「프라이부르크」시에서 멀리 떨어져 살았다. 국 여사는 고국에서 외과의사로 일했으나 서독에서는 소아과전문의 자격을 획득하기 위해 새로운 공부를 시작하고자 했다. 틈틈이 병원에 나가 생활비도 벌며 공부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처음 들어간 것이 「프라이부르크」 대학병원 흉곽외과. 일자리를 잡고 나서 국 여사가 독일에 도착한지 1년만인 57년 두 연인은 결혼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결혼은 법률적으로 예상 못했던 난관에 부닥쳤다. 시청에서는 국 여사의 성을 남편인 고 박사의 성으로 고치지 않으면 유효한 결혼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결혼신고를 받아주지 않았다. 두 사람은 한국의 전통을 들어가며 시청의 요구에 승복할 수 없다고 버티었으나 시청 역시 시 행정사상 그러한 예는 전무후무한 것이라고 법조문을 따져가며 막무가내였다. 고 박사 부부는 시청측을 설득하느라고 몇몇 지면이 있는 법률학 교수의 도움을 청해 6개월만에 가까스로 결혼신고를 접수시키는데 성공했다.
이 동안 「베를린」의 저명한 법률학교수의 자문을 받는 등 시청측에서도 이 문제의 처리에 골머리를 호되게 앓았을 거라고 고 박사는 말하고있다. 이 때문에 요즈음도 고 박사는 부인의 서독인 동료의사나 환자들로부터 「국 박사」로 불리어 난처한 때가 이따금 생기기도 한다. 부인의 성 국씨는 당연히 남편의 성을 따른 것으로 생각되어 그렇게 오해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는 게 고 박사의 말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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