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정재의 시시각각

부실 공기업, 씨가 마를 때까지 ③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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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정재
논설위원
경제연구소 연구위원

사실은 현오석 경제부총리가 ‘낙하산이라고 다 나쁜 건 아니다’란 취지의 말을 작년 12월에 했을 때, 진작 알아챘어야 했다. ‘아. 이 정부 역시 낙하산 근절 생각은 없구나’라고. 그날이 어떤 날이던가. 정부가 작심하고 공공기관 정상화 대책이란 걸 내놓던 날이다. 그런 날 “낙하산 대책이 왜 빠졌느냐”고 묻는 기자들에게 현 부총리가 한 답변이니 절대로 그냥 툭 튀어나온 말일 리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미련이 남아 다음에 추가 발표하려나, 근절은 아니더라도 자제 정도는 하겠지, 설마와 혹시 사이에서 몇 달을 흘렸지만, 끝내 해가 바뀌도록 낙하산 대책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니까 박근혜 대통령은 “낙하산은 참 나쁘다”는 말은 하면서도 낙하산을 그만 내려보내는 일 따위는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는 얘기인데, 그러므로 내가 지난 칼럼에서 2회에 걸쳐 낙하산 사장과 감사 얘기를 다룬 것은 애초부터 (‘저를 신이 되게 해주세요’나 ‘지구를 달로 만들어주세요’같이) 들어줄 수 없는 소원을 신에게 비는 순진한 아이처럼 헛일을 한 셈이다.

 그럼에도 또 얘기를 꺼내는 건 낙하산 근절이야말로 공기업 개혁의 처음이요, 마지막이란 나름의 확신 때문이다. 편 가르기와 정실·보은 인사의 상징 낙하산은 그 자체가 절대악이요, 척결대상이다. 고령화다 저성장이다, 밥그릇·일자리는 자꾸 주는데 누구는 줄 잘 선 덕에 좋은 자리를 차지한대서야 누군들 좋아하겠나. 게다가 예전엔 50대가 노리던 자리를 지금은 40대부터 70대까지 달려들어 경쟁한다. 탈락자가 더 많아지니 불만의 입도 늘어난다. 그러니 국민 눈높이에서 보면 낙하산 근절 없는 공기업 개혁은 개혁도 아니게 되는 것이다.

 청와대라고 이를 모를까. ‘잘 알지만 어쩔 수 없다. 그래도 낙하산은 계속돼야 한다’가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다 보면 결국 옛것을 배우고 익히게 된다. 이른바 낙하산 비난 피하기 신공. ‘낙하산 논란이 불거지면 일단 미룬다. 미루면 잊혀진다. 잊혀지면 다시 내려보낸다.’ 지난해 최○수·김○송 등이 그런 케이스다. 그런데 자꾸 미루다 보면 낙하 못한 낙하산이 많아진다. 그땐 어쩌나. ‘한꺼번에 해치운다’가 답이다. 대개 언론의 눈이 느슨해지는 연말 연초나 정권 말이 찬스다.

 이런 비법은 사실 노무현 정부 때부터 본격화했는데 흉보면서 닮는다더니 지난 정부를 거치면서 이젠 전통이 되다시피 했다. 이명박 정부 말년엔 240개 공공기관 250명의 감사 중 118명이 낙하산이었다. 지난 연말 연초 박근혜 정부도 40여 명의 무더기 낙하산을 내려보냈다.

 이런 일이 되풀이되는 건 정권을 잡고 나면 달콤한 말의 함정에 빠지기 때문이다. 바로 “낙하산이라고 다 나쁜 건 아니다”란 말장난이다. 이 말이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와 뭐가 다른가. 이 말을 처음 써서 정치 문제로 키운 건 내 기억 속엔 2005년 유시민 당시 열린우리당 의원이다. 소비자원 부원장 낙하산 논란이 불거지자 그는 “정무형 인사가 왜 나쁘냐”고 맞섰다. 당시 열린우리당과 노무현 정부는 낙하산을 요즘 말로 치면 ‘비정상의 정상화’쯤으로 여겼다. 이철(철도공사)·이재용(국민건강보험공단) 등을 내려보내면서 전 정권의 호남색을 지우고 소외된 영남 인맥에 제자리를 찾아준다는 식이었다. 이명박 정부도 더하면 더했지 다르지 않았다.

 이미 정치권과 사회에 낙하산 중독은 심각한 수준이다. 금단 증상이 아주 심하다면 독성을 천천히 빼는 방식도 고려할 만하다. 예컨대 각 기관별로 선임절차를 달리하는 식이다. 295개 공공기관을 임명제·공모제·국회 사후 검증제 식으로 구분, 대통령이 꼭 낙하산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곳만 임명제로 묶는 것이다. 임명하면 자질 시비는 있을지언정, 낙하산 시비는 사라진다. 시행착오가 있겠지만, 아무 시도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낙하산 시비만 확 줄어도 국민은 공기업 개혁이 반은 성공했다고 느끼게 될 것이다. 그게 낙하산은 놔둔 채 방만 경영을 바로잡고 사업을 구조조정하며 피 말리는 노조와의 싸움을 통해 부채를 줄이는 것보다 훨씬 쉽고 빠른 길이다.

이정재 논설위원·경제연구소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