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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서구민주주의의 「딜레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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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인플레」심화·경기후퇴·국제수지 악화라는 경제적 3중고를 앓고있는 서구는 올해 거의 모든 국가에서 지도자가 교체되는 정치적 동요를 겪었다.
영국의 2차례 선거, 「이탈리아」내각의 3차례에 걸친 붕괴, 「지스카르-데스텡」 신 「프랑스」대통령과 「브란트」를 이은 「헬무트·슈미트」 서독 수상의 등장, 「포르투갈」 군사「쿠데타」 이후 「이베리아」반도의 정세변화, 「그리스」군사독재의 종식과 「카라만리스」수상의 복귀…대서양 건너 미국의 「닉슨」대통령 사임.
이러한 정치표층상의 급격한 변화를 우연의 일치로 보기는 어려우며 그 밑바탕에 서구 현 체제의 근본적인 동요가 깔려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서구문명 성장여건에 변화>
서구의 현질서가 이처럼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은 서구문명 그 자체의 성장여건에 근원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19세기 말 소위 「제국주의시대」를 통한 세계의 분할지배체제 위에 이루어졌던 서구의 경제적 번영과 그 위에 만개할 수 있었던 자유민주주의체제는 「오일·쇼크」이후 1차 자원의 공급제약이라는 외적조건 외에 경제성장의 내적 윤리에 대한 회의가 대두함으로써 흔들리기 시작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경제학자 「존·로빈슨」의 표현을 빌면 「60년대는 경제성장의 황금시대」였다. 노동인구의 증가·자본축적·기술진보 등이 공동보조를 맞춰 노동력의 안전고용·자본설비의 표준적 조업을 지속적으로 보증하고 국민총생산이 노동생산성을 함축하면서 끊임없이 증가해간다고 믿었던 환상은 70년대에 들어오면서 일시에 분출한 난제들과 직면하자 쉽게 꺼져버렸다.
고도성장에 따른 환경오염의 심화·「인플레」·제1차 자원공급의 제약이 뚜렷해지고 경제성장보다는 성장의 질이, 그리고 분배의 공정이 문제되면서 부와 권력을 둘러싼 계층간의 대립이 첨예화했다. 특히 노동조합의 단체교섭력 증대와 서구공산당의 뚜렷한 진출은 서구 자본주의에 대한 커다란 도전이었다.
금년 2월 영국의 보수당 정권이 무너진 것은 탄광노조의 파업에 의한 것이었으며 그 후 집권한 노동당도 노동조합회의(TUC)와 「사회계약」을 맺어 노조에 정치적 책임의 일부를 분담시키려 했지만 그 성공여부도 극히 회의적이다. 10월 한달에 걸친 우편노조의 파업에 이어 좌파계의 노동총동맹(CGT)이 주도한 전국총파업이 「프랑스」정국을 긴장시켰고 「이탈리아」의 강력한 직업별 노동총동맹(CGIL)은 만성적인 정치혼란의 원인이 되고있다.
이와 한께 서구공산당, 특히 남부「유럽」지역국가의 공산당들은 금년 들어 상당한 정치세력으로 성장했다.
「4·25」군부 「쿠데타」이후 「포르투갈」에서는 「유럽」최초로 공산당원이 입각했고「그리스」에서는 공화당이 합법화되었으며 「프랑스」에서는 공산당과 사회당으로 이루어진 좌파연합의 후보자 「프랑솨·미테랑」이 대통령 선거에서 49%의 득표를 했다.
특히 「이탈리아」내각의 붕괴는 공산당의 입각을 요구하는 사회당이 연정에서 이탈함으로써 초래된 것이었다.
지난 1월26일 「브뤼셀」에서 열린 서구공산당대회에서 「노동자와 모든 민주세력의 공동투쟁을 강화」하고 사회주의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모든 진보세력과 광범한 동맹정책을 추진한다」는 강령을 채택한바 있었다.
이러한 노선은 「유럽」최대의 조직(당원 1백60만명)을 가진 「이탈리아」공산당 서기장「엔리코·베르링게르」가 주장하는 「역사적 타협」노선을 확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국가의 혁신을 목표로 하는 국민운동에 참여할 모든 구성분자간의 결집을 호소한 「베르링게르」의 선언은 전후 「이탈리아」를 지배해온 기민당에 대해 정치참여를 요구한 하나의 도전장이었다.
이와 같은 서구공산당의 「타협」노선이 우파 정권들의 파국으로 빚어진 정치적 공백을 이용하려는 전략적 분식이라 할지라도 이미 상당한 국민적 지반과 노조를 배경으로 한 이들의 조직적인 요구를 전적으로 배제하기는 어렵게 되었다.

<좌절감에서 폭력으로>
공화당의 진출을 과점적 지배의 교리로 변한 근대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으로 본다면 서독과 「프랑스」 「이탈리아」에서 잦은 극좌·극우파의 과격한 「테러」행위는 후기산업시대의 빡빡한 관리사회가 개인에게 주는 왜소감과 좌절감이 폭력화 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프랑스」 「르노」자동차공장의 노동자들이 대규모 「스트라이크」를 일으켰을 때 이들의 요구는 임금인상이 아니라 노동내용의 개선이었다는 사실은 이점을 명백히 해주고 있다. 「오토메이션」화가 진행되면 될수록 단조롭고 세분화되는 노동에 대해 이들은 노동시간의 조절과 작업 「리듬」을 개선하라고 요구했다.
아무리 항변하고 문필로 공격해도 끄떡 않는 거대한 조직 앞에서 무력감을 폭력으로 배설한 것이 서독의 「바더·마인호프」단과 같은 무정부주의 「테러리스트」들이다.
지난 68년 월남전 반전운동을 계기로 미국과 「유럽」전체를 휩쓸었던 반체제·반문화 운동은 일단 수그러졌지만 이들이 제기한 체제에의 도전과 반성의 여운은 착잡하다. 「닉슨」의 사임은 위정자의 도덕적 타락이라는 정치「게임」상의 비리와 부정 때문만이 아니라 중산층에까지 받아들여지고 있는 반체제·반문화 운동의 정신이 정치의 장으로 투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고 이런 현상은 「새로운 인물이면 누구든 좋다」는 식의 지난 11월 미국 중간투표결과가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미국의 반문화운동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달려간 데 비해 「두츠케」 「콩방디」의 주도아래 「유럽」을 휩쓸었던 학생운동은 기묘한 반작용을 낳고 있다. 「계급정당에서 국민정당으로」변신한 서독사회당(SPD)을 비난하면서 의회 외 반대세력(APO)으로 결속되었던 좌파운동이 오히려 주춤하고 기독교민주당 청년당원이 20만명으로 급격히 늘어난 사실은 반체제운동의 반작용으로 나타난 청년층의 보수화라고 표현할 수 있다.

<반문화·불황 동시엄습>
극좌「테러」와 청소년층의 보수화에 이르는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다양한 방향 속에 서구는 갈팡질팡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6월 「슈미트」서독수상은 『지금과 같은 「인플레」와 불황이 계속된다면 서구는 심각한 정치적 혼란에 빠져들 것이며 경제적·정치적 무정부상태가 발생하여 극우 혹은 극좌정권이 생길 위험이 있다』고 우려한바 있다.
30년대의 대공황 때 서구인들이 자신들의 자유를 포기하고 「나치즘」과 「파시즘」으로 도피했던 사실을 상기시켜주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서구 민주주의가 직면한 「딜레머」는 민주주의의 「르네상스」라고 할 반체제·반문화의 물결이 일반적인 경제적 위기와 때를 같이해서 밀려온 데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기존 체제의 당위성이 무너져 내리는 가운데서 위기극복에 필요한 거국적인 「콘센서스」는 좀처럼 얻어지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김영배 기자>
차례
①프롤로그
②자원위기의 쇼크
③서구 민주주의의 딜레머
④단결 다지는 「제3세계」
⑤후진국정치체제의 동요
⑥동서 「해빙」의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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