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격돌과 소란으로 어려워진 대화-90회 정기국회의 결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대치와 일방통행을 거듭하던 90회 정기국회는 17일 변칙처리로 도미를 장식하고 문을 닫았다. 이번 정기국회에선 회기 초 신민당이 정치입법과 개헌을 들고 나와 어느 때보다 정치와 체제문제가 전면에 부각되었다. 특히 10월7일 김영삼 신민당 총재가 대표질의에서 개헌만이 최대목표라는 야당의 방향을 설정한 뒤 국회는 개헌공방으로 시종했다. 「모든 정치문제를 원내에서」란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운 여당이었지만 아직 체제나 개헌문제를 정치 속에서 소화할 태세는 되어있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치를 그대로 투영하는 국회는 파행할 수밖에 없었다.
90일 회기 중에 여야가 자리를 같이한 기간은 불과 반뿐이며 그나마 휴회와 유회기간을 빼면 20여일 밖에 되지 않았다. 내년도 예산안을 포함한 대부분의 의안이 여당 단독으로 처리됐다.
현 시국의 최대 정치문제인 개헌에 대해서도 이번 국회가 눈에 띌만한 결실을 맺진 못했다. 야당이 제의한 개헌기초심의특위가 결국 변형된 채로나마 구성되지 못했다.
다만 개헌논의만은 이번 정기국회기간에 큰 변화를 가져와 김 총재의 대표연설을 계기로 양성화되기 시작, 그 이후 한달 안에 시정에서조차 이 문제를 얘기할 수 있는 분위기로 발전했다.
그러나 아직 개헌이 정치적으로 소화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이러니 기본방향 설정부티 첨예하게 대립한 여야관계는 사사건건 부닥칠 수밖에 없었다.
국회의 파행이 시작된 11월 이후 세 차례 협상이 이뤄졌으나 곧 깨지는 운명을 겪었다.
지난달 14일 신민당 의원들의 「데모」를 앞두고 여야는 특위명칭에서 개헌을 빼는 대신 주문에 넣는 식으로 협상을 벌여 대체적인 합의에 이르렀다.
그러나 야당의 개헌투쟁 「이미지」를 심는 것이 변형된 특위보다는 더 중요하다는 김 총재의 고집에 따른 「데모」로 협상은 깨어졌다.
그 후 여당 단독통행, 야당의 농성을 거쳐 지난 10일 가까스로 이루어진 여야협상은 다음날 벌어진 자구시비로 새 협상의 진통을 겪었다. 산고 끝에 이루어진 재협상마저 하루만에 신민당 정일형 의원의 『박 대통령 하야준비 용의』발언과 이어 벌어진 여야 난투극으로 완전히 깨지고 말았다.
정치가 결여된 풍토에서 대화란 의미를 상실했다. 대화가 통하지 않는 국회엔 「데모」·농성·난투·육박전 같은 원색적 행동만이 난무했다.
그러나 이번 정기국회는 실제로 일한 날에 비해 처리안건은 87건으로 예년에 비해 오히려 풍성하다.
지난 1일 일요 단독국회에서 76건, 17일 변칙처리과정에서 8건이 무더기 통과됐기 때문이다. 여야합의로 통과된 안건은 금년도 추경예산과 북괴규탄결의안 뿐이다. 이러한 비정상적인 의사운영의 기본책임은 여당에 있으나 야당에도 책임의 일단이 없지 않다.
개헌투쟁의 일환으로 채택된 예산심의거부전략은 결과적으로 야당의 일방의사처리를 초래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번 국회에서의 여당단독처리과정은 의정운영에 많은 문제점을 제기했다.
우선 심의가 너무 소홀했다. 대부분의 의안을 거의 무수정 통과시키고 국민부담을 줄여야 하는 국회에서 예산을 오히려 3백억 증액한 사실이 소홀하고 무책임한 측면을 대표한다.
또 회기 마지막의 변칙처리는 본회의장 안에서마저 무엇이 상정됐는지, 통과됐는지도 모르게 의사운영이 돼 우리국회 변칙의 역사에 새 장을 기록했다. 의사속기마저 안되고 여당과 국회사무처 측의 통과주장과 야당의 통과사실 없다는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이러한 변칙은 정일권 국회의장에 대한 야당의 불신임 공세란 불씨를 하나 더 보탠 셈이다.
더욱이 문제는 단독운영에 재미를 붙인 듯한 여당의 행태다. 야당이 무조건 등원을 선언하자 이 틈새에 수십개의 법안심의를 상임위원회에서 본회의까지 모두 끝내는가 하면, 지난 14일에는 야당이 하루 상임위원회에 불참한 틈을 타 전격적으로 33건의 법률안을 처리한 것이다.
「야당이 없는 게 오히려 다행」식의 사고방식은 입법부를 「통법부」로 전락, 행정부의 시녀화를 자초하여 국회의 권위를 상실한다는 비판이 많다.
정일형 의원의 발언문제로 90회 정기국회는 여당이 야당과 국사를 논할 수 없다는 정도의 분위기에서 변칙처리란 새 불씨만 더한 채 폐회했다.
야당은 20일 개헌추진 전남도지부 현판식을 선두로 원외투쟁에 나선다. 여당은 대응원외활동을 계획하고 있으며 강경한 대응책도 검토중이다.
여야관계의 경화는 자칫 정국의 해빙추세에 한파를 불어올지도 모른다. 2월 임시국회합의마저 파기돼 현재로서는 국회개회의 기약은 없다. 다만 추경예산의 필요, 정치정세의 변화 같은 변수가 생길 때 국회는 열리리라 봐야 한다. <성병욱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