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15 저격|문세광 담당 권종근 판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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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8월15일 상오10시23분, 장충동국립극장에서의 제29회 광복절기념식, 3천여 참석자의 귀를 찢은 총성 한 발, 잇따라 터진 6발의 총격, 장내의 술렁임…. 이로 인해 숨진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 여사.』
그로부터 1백10여일, 한여름의 총성은 가시고 차가운 세모. 서울형사지법 권종근 부장판사는 비록 그 사건의 현장에 있지는 않았으나 문세광이라는 22세의 재일 교포 청년이 저지른 엄청난 범행의 과정을 낱낱이 되새기고 있다.
이 사건의 제1심 담당재판장으로 3천「페이지」가 넘는 수사 및 공판기록을 외다시피 엄밀한 심리를 했기 때문이다. 『흉악한 국사범(국사범)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험상궂으리라 생각했었는데 막상 법정에 선 모습을 보니 앳되고 순진한 얼굴에 단정한 몸매, 또 어디서도 한나라의 원수에게 총을 겨눈 살의(살의)를 찾아볼 수 없었다』는 게 첫 인상.
이따금씩 실눈을 흘기며 나이답지 않게 꼿꼿한 자세로 의연한 듯 했으나 재판장 석에서 굽어본 문세광은 마치 훈육주임 앞에 불려 온 모범학생처럼 겁먹은 표정이 역 력, 그를 보는 순간 가공할 공산주의의 마수에 대한 증오에 몸서리를 느꼈다고 한다. 『책가방을 끼고 「캠퍼스」의 오솔길을 걷거나, 친구들과 어울려 시시덕거리는 것이 오히려 다정히 보일 나이인데 총 장난을 했으니….』
그는 한국사람이라고 차별대우를 받아 온 성장고정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한국사람은 보통인간과 다르다는 일본선생으로부터의 굴욕적인 말을 듣고 이런 차별대우를 없애기 위해 공산주의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했다.
『이런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마치 그가 습 기찬 음지에서 피어나는 독버섯과 같다고 느꼈어요. 그의 범행 뒤에는 악의 조건이 바로 그렇게 도사리고 있었음이 분명해요.』권종근 부장판사는 교포 2세로서의 그의 성장기, 교우관계, 주변의 여건 등 모든 것이 그로 하여금 음모의 씨앗을 길러 내기에 충분한데다 이지러진 영웅심을 십분 악용한 조총련의 충동질까지 보탰으니『그가 만경봉호에서 북괴의 공작지도 원에게「젊음과 생명」을 바치겠다고 선서했다는 맡은 수긍이 간다』고 했다.
심리가 진행되는 동안 권 재판장은 다른 형사사건의 공판에서는 얻을 수 없는 몇 가지 교훈을 얻었다고 했다.
문세광이 성장기에서 민족적 소외감을 호소했을 때 해외 청소년선도에 대한 우리의 사회적 책임 및 정부당국의 해외교민정책이 어떻게 개선되어야 하나를 생각했으며 그가 비 표도 달지 않은 채 아무런 제지 없이 삼엄한 경비선을 통과, 총질을 했다고 털어놨을 때 우리네의 정신자세가 얼마나 허술했던가를 절감했다고 한다.
『51년 12월26일생이니 그는 50년에 일어난 6·25사변도 알지 못합니다.
그가 태어났을 때 우리가 겪은 어려움을 이해할 수 없을 거예요. 북괴의 맹랑한 선전으로 이 또래의 일본청년들 일부에는 6·25사변은 남한에서 공격을 개시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을 정도라니.』권 부장판사는 결심공판 때 검찰의 논고가 『피고인의 그 국적, 그 조국은 어딘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는 대목에 이르렀을 때 문세광이 입술을 깨물며 얼굴에 경련을 일으키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국가와 국민전체에 대한 범죄자로 단죄되자」옷자락에 땀을 닦으며 퇴정하는 문세광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권 부장판사는 코끝이 찡해 옴을 어쩔 수 없었다 한다. 『아들 신천이와 아내와 함께 살 수 있었던 때가 행복했고 인생의 전부였다』는 문세광-. 영웅적 환상에 사로잡혀 한낱 꼭두각시 노릇을 한 그에 대한 안타까움보다는 역설적이지만 그가 우리에게 준 교훈이 여러 가지로 너무도 값진 것이었다고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정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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