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7)<제자 김태선|<제41화>국립경찰 창설(55)|김태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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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6·25동란을 불과 1년 앞둔 1949년에 접어들면서 남로당은 김삼룡을 비롯한 간부들의 대량검거로 그 당 세가 여지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당 세가 쇠퇴해 가자 그들은 산악지대를 근거로 한「빨치산」활동을 강화하고 살인·방화·약탈 등으로 그들의 발악은 절정에 이르렀다.
좌익계열에서는 49년 봄부터 「3월 공세」니「4월 공세」니 하는 유언비어를 퍼뜨리며 민심을 혼란하게 만들었다.
공산당은 남한을 공격, 인민공화국을 수립하고 그들의 수도를 서울로 옮겨온다고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이와 함께 곳곳에서 유격전파파괴공작을 펴고 이 공세에 가담하는 사람은 인민공화국이 수립될 때 상당한 지위를 보장해 준다고 허위선전을 일삼았다.
8월이 되자 좌익에서는 소위「조국통일 민주주의전선」이란 이름아래 잔당을 정리, 8월 공세야말로 반드시 성공한다고 불어 댔다.
3월부터 시작된 공세 설이 8월까지 연기되자 일부 좌익계열에 가담했던 사람들 가운데는 그때서야 그들의 권모술수에 속은 줄 알고 전향하는 자가 속출했다.
그러나 공산당은 단념치 않고 다시 9월 공세를 내걸고 9월20일까지는 남한을 접수, 총선거를 실시한다고 엉뚱한 소문을 퍼뜨렸다.
공산당은 이 같은 공세를 위해 그 해 7월에는 이른바「전농」·민애청·여맹·민학·교육자협회 등 산하단체를 동원, 폭동계획을 세우고 요인암살 등을 지령했다.
공산당은 행동대로 「K대」와 「ST대」(특별행동대)라는 유격대까지 조직했었다.
항간에는 미군이 철수하면 인민군이 밀고 내려온다느니, 서울시내에는 벌써 비밀히 월남한 인민군 다수가 잠복해 있다는 등의 유언비어가 나돌고 민심이 뒤숭숭했다.
이 같은 사태를 수습하는데는 경찰의 힘만으로는 어려움이 많았다.
나는 당시 전봉덕 헌병사령관과 공동명의로『군·경을 신뢰하고 유언비어에 현혹되지 말 것』을 당부하는 내용의 포고문을 만들어 거리에 내다 붙였다.
이 포고문은 위엄을 나타내기 위해 가장자리에 붉은 선으로 테를 두르고 주먹만한 먹 글씨로 작성했다.
이 포고문이 나붙자 또 항간에는 계엄령이 선포된다는 헛소문이 퍼졌다.
일부 외국기자들까지도 국방부장관과 면담을 요청하고『언제 계엄령이 선포되느냐』고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경찰과 군에서는 계엄 설을 부인하느라고 진땀을 뺐다.
유숙계 제도를 실시한 것도 이때의 일이었다.
유숙계란 불온 자를 색출하기 위해 가구주로 하여금 16세 이상 60세 이하의 유숙 자나, 또는 집안식구중 외박한 사람이 있을 때는 관할 반장에게 신고토록 한 것이었다.
신고를 받은 반장은 즉시 경찰지서 또는 경찰관 파출소에 신고하게 돼 있었다.
유숙계 제도는 그 해 6월4일부터 서울시내 전역에 걸쳐 실시됐으며 이를 계기로 종래 30가구로 구성됐던 반을 10가구씩 세분하고 위반자는 경찰처벌규칙을 적용, 처벌키로 했었다.
이러 던 중 시경에서는 그 해 9월21일 서울시내 중구오장동 등 7개소에서 남로당의 무기제조공장을 적발, 수류탄껍질 6천 개와 화약 17상자 등을 압수했다.
공산당은 행동대를 중앙청을 위시한 서울시내 관공서·요인저택·주요건물 등에 배치, 이 수류탄을 같은 시간에 일제히 폭파시켜 일대혼란을 야기 시키기 위한 음모를 꾸미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들이 퍼뜨렸던 3월 공세니, 9월 공세니 하는 소문은 모두가 6·25남침을 앞두고 정보가 새어나가는 일이 있더라도 헛소문으로 위장하기 위해 만들어 낸 계획적인 작전임이 틀림없었다.
사실 6·25직전 경찰에는 북괴가 남침할 것이라는 정보가 수없이 입수됐지만, 그들이 상투적으로 내거는 공세 설의 하나로만 생각하고 제대로 대책을 세우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6·25 두 달 전인 50년 4월24일자로 치안국장으로 발령을 받았으나 당시의 혼란한 상황으로 보아 수도치안을 더 돌봐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시경국장에 그대로 머물러 있겠다고 이승만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나는 이대통령을 찾아가『각하. 저는 계급이 높아지는 것이 좋기는 하지만, 지금 한창 공산당이 발악하고 있는 이때 시경을 떠날 수 없습니다. 내가 하고 있는 공산당 타도가 끝날 때까지 그대로 있게 해주십시오』하고 부탁했다. 내 말을 들은 이대통령은『그럼, 그래야 되지. 지금은 자네 같은 생각을 가져야 할 때야』하며 기뻐했다. 이대통령은 즉시로 나를 시경국장과 치안국장을 함께 맡도록 겸임 발령을 내게 했다.
이래서 나는 그 때부터 50년 6월17일까지 치안국장까지 겸했지만, 항상 시경에 더 신경을 썼었다.
나는 그 뒤 동란 중에 다시 치안국장(50년 7월17일∼51년 6월20일)을 지내고 52년 7월24일부터 약 l개월 동안은 내무부장관(9대)을 지내면서 경찰과는 경무부 시절부터 7년여에 걸쳐 동고동락을 해 온 셈이다. 나는 혼란시기를 경찰에 몸담고 지내면서 6·25전까지 겪고 본 일들을 적어 놨지만, 돌이켜보면 부끄럽기만 하다. 6·25동란 발발이후의 일은 아직도 얘기하기가 시기상조인 것 같아 다음기회로 미루기로 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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