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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인간이 되어 세상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인간은 흔히 자기의 입장만을 중심해서 생각하고 결정하고 행동한다. 입장이 바뀌면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닐텐데 현재의 자신의 입장에서만 보면 그렇게 생각이 굳어지는 모양이다.
그런 사고방식과 행동강령에서 빚어지는 삶의 태도란 고집이요, 독단이요, 일방통행이요, 배타요, 편파로 나타난다. 그게 심화되고 고질화되어 마침내 절대화하게 되면 그것은 굉장히 큰 비극의 요인이 될 밖에 없나.
오늘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거의 이처럼 자기주장의 절대화에서 생겨나는 비극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이란 그 얼굴이 각각 다르듯이 모두가 특색 있는 사고와 개성 있는 견해를 가질 수 있다. 그처럼 서로 다름을 지닌 곳에 인생의 묘미가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다름을 지닌 인간들이 그 다름을 버리지 않은 채 한 사회 안에서 서로 어울려 살 수 있다는 일이 이른바 민주주의적인 삶이 아니겠는가? 거기서는 이해와 존경과 아량과 포용력으로 이루어지는 조화된 인생의 꽃밭을 체험하게 된다.
어떤 일률적인 체제가 굳어지고 일원화된 고정질서만이 기계적으로 작용하는 사회는 순응과 복종에 의한 안정은 있을지언정 창조력이 위축되고 비판의 기능이 마비되는 까닭에 그런 분위기 속에서 무슨 발전이나 향상이나 진보 따위를 기대하기는 나무에 올라서 물고기를 구하는 격이 되고 말기가 쉽다.
기독교가 명절로 여기는 성탄절은 오늘에 와서 하나의 세계적인 명절이 되었다. 그렇게 된 데는「예수」가 역사상 위대하신 성현 가운데 한 분이시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그보다도 우리는 성탄절에서 그 이상의 깊은 의미를 읽어보고 싶다. 신이 인산이 되어 세상에 오셨다는 이야기에서 우리는 보다 높은 차원에서의 화해와 은총의 역사를 읽는다. 인간을 구원한다는 일은 인간을 깊이 이해한다는 일에서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다.
인간이 겪고있는 죄와 불행과 고난의 사실을 깊이 이해하고 그 속에 신 자신이 뛰어들어 함께 고난을 맛보시고 합께 불행을 체험하셨다는 이야기다. 그러기에 기독교가 믿는 신은 초월자이시기 보다는 「예수」를 통하여 자신을 나타내시는 신이시요, 인간과 더불어 고난과 불행에 함께 참여하시는 분이시다.
「예수」자신의 삶의 자세는 늘 눌린 자의 편에 서고 가난한 자의 친구로서 그들에게도 가고 버림받은 자, 소외된 자, 눈먼 자, 외로운 자들과 벗이 되어 그들의 삶에 보람과 기쁨과 긍지를 느끼도록 하신 것이다. 그들의 고통을 「예수」자신이 맛보신 것이요, 그들의 슬픔과 외로움을「예수」자신도 체험하신 것이다.
오늘날 세계의 많은 강자는 약자를 이해하지 못한다. 오늘의 부자는 가난한 자를 멸시한다. 오늘의 다수파는 소수파를 무시하는 경향이 도처에 팽배하다. 오늘의 권력자 가운데는 힘없는 이들을 짓밟아 그늘진 인생들을 신음케 하고 억울한 피해자들의 소리를 높게 한다. 이해와 조화와 바꿔 생각하는 일과 대화의 길은 점점 황폐화하고 그 대신에 억압과 강포와 독선과 강요 등의 잡초만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것 같다.
「예수」는 이러한 비극적 요인을 인생에게서 제거하시기 위해 세상에 나신 분이시라는 것이 성탄절의 「메시지」다. 『내가 만민에게 미칠 큰 기쁜 소식을 너희에게 전해준다』라고 천사들이 외쳐 주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자신이 중생에게 나섰을 때에 그의 제1성은 『주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심은 가난한 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심이라. 주께서 나를 보내심은 포로된 자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자들에게 눈 뜨임을 선포하며 눌린 자들을 놓아주고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심이라』(누가복음서 4장)는 것이었다.
성탄절은 실로 화해와 자유와 평화의 계절이다. 우리사회 안에도 일체의 억압과 불의와 횡포가 사라지고 참된 자유, 그리고 참된 평화가 넘쳐 서로 다름을 지닌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살 수 있는 사회가 되도록 해야겠다. <마경일 자교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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