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기업 개혁이 성공하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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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요즘 경제 분야마다 '안 좋고, 나빠지는 것' 투성이지만 은근히 괜찮은 곳이 하나 있다. 바로 기업 인수.합병(M&A)시장이다. 코스닥시장에 따르면 올 들어서만 최대주주 교체 공시가 30여건에 이른다.

"기업 매물이 지난해 4분기부터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일은 원체 비밀리에 이뤄져 정확한 규모를 알기는 어렵습니다. 최근에는 '상장.등록 기업과 일정한 규모가 되는 비상장회사 중에서만 2백~3백개는 될 것'이라는 업계 추산이 떠돌기도 했습니다.

여기엔 2, 3대 이하 주주가 지분을 팔려는 것도 포함돼 있어 실제 경영권을 포함한 회사 전체를 매물로 내놓은 경우는 훨씬 적겠지만 그래도 상당한 규모가 될 것입니다."

최근 한 증권사 M&A 팀장이 해준 말이다. 이 팀장은 "제조업이 가장 많고, 유통.서비스업체도 꽤 된다"며 "주가가 반토막난 곳이 많아 싼 값에 살수 있는 좋은 기회인데도 상대적으로 적은 원매자가 우월적 지위에 있는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한국은행이 매달 내는 통계 가운데 '어음 부도율'이 있다. 2월 통계는 지난 19일 발표됐다.

그 며칠 전 한 은행 임원을 만났는데 "요즘 경제가 정말로 나쁘냐"고 물었더니 대뜸 "한은의 부도율 통계를 한번 살펴보라"고 말했다. "아마 올라갔을 것"이란 설명과 함께.

그 임원에 따르면 지난해까지 흑자를 내는 등 멀쩡하던 거래업체 몇 곳이 올 들어 부도를 냈으며, 아예 기업 경영을 그만두고 싶어 하는 사람도 꽤 있다는 설명이었다.

19일 한은이 발표한 통계를 보고 깜짝 놀랐다. 지난달 전국의 어음부도율이 0.08%로 전달의 0.04%에 비해 크게 높아졌던 것. 한은은 "1월 말에 부도 처리됐어야 할 어음 결제가 설 연휴 때문에 지난달 초로 늦춰진 게 큰 요인"이라고 설명했다.

물론 이런 특수한 요인도 작용했겠지만 갑자기 두배로 높아진 데에는 앞의 은행 임원이 설명한 사례들도 꽤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수개월 동안 거의 매일 쏟아져 나온 경제 관련 각종 숫자들 가운데 반가운 것은 거의 기억에 없다. 성장률.물가.무역수지 같은 굵직굵직한 거시 지표에서부터 소비.투자심리 등 현장 지표들까지 안 좋은 것, 나빠진 것 일색이어서 때로는 이를 보도하기가 민망하기까지 했다. 경제가 나쁘다고 보도하면 이 때문에 더 나빠지게 되는 것은 아닌지 고민이 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반겨야 할지, 아닐지 해석이 어려운 통계가 하나 있었다.

한은이 지난 17일 발표한 '제조업 현금 보유 현황'이다. 지난해 말 현재 국내 제조업체들이 보유한 현금이 46조원으로 1년 전보다 13조원이나 늘면서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는 것이었다.

기업들이 돈이 많으면 어려움에 견디는 힘이 강해져 경제도 튼튼해진다. 그러나 쌓아 놓기만 하고 투자를 하지 않으면 미래도 없다. 이런 현상들엔 과장된 측면도 있을지 모르나 종합하면'기업가 정신'이 움츠러든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이라크 전쟁이 터졌다. 이 전쟁이 언제 끝날지 모르지만, 설령 단기간에 끝난다 하더라도 경제가 좋아질 만한 조짐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세계 경제 전체가 허덕이고 있는데다, 북핵 문제가 이슈가 되면 가뜩이나 어려운 한국 경제를 더 옥죄게 될 것이다.

새 정부는 줄기차게 개혁을 강조한다. 그러나 개혁에 성공하기 위해서라도 경제는 튼튼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 첫걸음을 '기업하려는 마음'을 살려주는 데에서 출발하는 것이 어떨까. 기업에 대한 채찍 못지않게 애정과 관심도 필요하다.

민병관 경제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