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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미의 마음 엿보기] 글쓰는 노동과의 이별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62호 22면

중학교 시절, 수업시간에 “민주주의면 민주주의지 한국적 민주주의는 뭐냐”고 질문하자, 선생님이 따로 불러 “앞으로 일절 말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라고 조용히 타이르신 적이 있었다. 아마도 다칠까봐 배려해 주신 것이겠지만, 그때 이후 될 수 있으면 할 말은 많지만 생각을 입 밖에 내지 않으려 나름대로 애쓰며 살았다. 워낙 독특한 생각이 많아 남들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결혼해선 싫어도 싫은 내색 않는 것이 종갓집 며느리 처신이란 엄명을 일종의 족쇄처럼 받잡고 살았다. 정신과 의사란 직업 역시 비슷한 맥락으로, 내 입을 막은 적이 적지 않았다. 20여 년 전, 내 책이 세상에 나왔을 때 주변의 반응 역시 환영만은 아니었다. “참으로 용감하다”란 걱정 아닌 걱정부터 “원고 실어달라고 돈은 얼마 줬느냐” “출판비용은 얼마냐” “방송의 누구 인맥을 활용했느냐” 등 황당한 질문도 받았다. 전문가들이 매스컴을 일종의 홍보 수단으로 활용한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많으리라. 그래서 비록 전업 작가는 아니지만 ‘글쓰기란 노동’은 정당하게 인정받아야 한다며 원고료 주지 않으면 글은 쓰지 않겠다고 고집한다. 이렇다 할 작품 하나 없지만 나름대로 글 쓰는 이로서의 자존심은 지키며 살고 싶었다.

일러스트 강일구

하지만 5년간의 외국 생활이나 그 후 몇 년간은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에 자신이 없었다. 분석심리학 공부를 오랫동안 하면서 한국어를 구사하는 능력도 퇴보된 것 같았다. 병원 내담자의 마음을 분석하는 데 내 글이 방해가 될까도 걱정됐다. 기억도 못할 글들을 계속 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책을 쓴다고 세상에 무슨 이로움이 있을까 등등 마음이 복잡했다. 해서 중앙SUNDAY에서 마음에 대한 칼럼을 써 보라는 제안을 받았을 때는 고마운 한편 걱정도 많이 되었다. 용감했던 30대와는 달리 글에 대한 자신감도 많지 않아 신문을 읽는 독자들과 다시 소통한다는 사실이 떨리기도 했다. 소소한 일상에 국한된 건강 칼럼을 쓰라는 무언의 요구가 초기엔 아주 없는 것도 아니었으나 워낙 장난기와 반항심이 마음속에 숨어 있는지라 글감의 지평을 점점 더 무모하게 넓힌 것도 같다. 거침없이 마구 쓴 내 글 때문에 상처받은 이들은 없었는지 걱정도 된다. 돌이켜보면 글의 시작은 마음 안팎에 대한 호기심과 질문이었으나, 부드러운 연애편지보다는 고집 센 노인처럼 자기비판이 부족한 억지 결론과 독백이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웃에 대한 사랑, 이 사회가 살기 좋은 세상이 됐으면 하는 소망을 버리지 못해 재주도 없으면서 글쓰기를 계속해 온 것 같다.

어쨌거나 때가 되면 커튼을 내려야 하는 연극 무대처럼 아쉽고 부족한 부분은 많지만 칼럼 쓰기를 멈춰야 한다는 생각은 상당히 오래전부터 해 왔다. 이제는 건강과 재능 등 여러 가지 이유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점이 된 것 같다. 죄송함을 무릅쓰고 ‘이나미의 마음 엿보기’를 마친다는 인사를 독자들에게 올린다. 무모하고 편벽되며 거친 글들을 검열 않고 그저 소소한 잘못만 꼼꼼하게 짚어 준 배려 깊은 데스크 식구들, 그리고 오랫동안 필자의 부족한 글을 참을성 있게 읽어 주신 수준 높은 독자들과 그간 정든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는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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