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5)제41화 국립경찰 창설(13)|<제자 김태선>김태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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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수도청장과 취조 경찰관>
장택상씨는 소도청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숱한 일화를 남겼다.
정판사 위폐사건의 공판이 열렸던 46년7월29일 공판정인 경성지방법원 경비에 직접 나섰던 장 청장은 흥분한 나머지 부하 경찰관들의 뺨을 군중들이 보는 앞에서 마구 때려 뒤에 공산당의 선전자료가 되기도 했다.
그날 경성지방법원에는 아침부터 몰려든 좌익분자들이 공판을 방해하기 위해 적기가와 조선공산당 만세를 부르고 마침내는 경비경찰관들을 향해 돌을 던지면서 폭도화했다.
출동했던 경찰관들이 폭도들의 기세에 밀려 물러나려 하자 장 청장은 직접 앞장서서『투석자를 검거하라』고 소리쳤으나 경찰관들은 비오듯 쏟아지는 돌멩이를 겁내 감히 나서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이를 본 장 청장은『돌멩이가 그렇게 겁나느냐. 이 졸장부들아』하고 호통치며 머뭇거리는 순경들의 뺨을 닥치는 대로 갈겼다. 이를 두고 공산당에서는『장택상은 자기 부하를 대중 앞에서 구타하여 그 광견성을 더욱 명백히 드러냈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하고 장 청장의 해임을 요구하기도 했다.
하루는 장 청장이 미군정청으로「아놀드」군정장관을 만나러 갔다가 또 한번 손찌검을 했다.
미군경청에 새로 부임한 미군부관 한 명이 정복차림의 장 청장을 보고도 책상 위에 두 다리를 올려놓은 채『무슨 용무요?』하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를 본 장 청장은 다짜고짜 그의 귓싸대기를 몇 대 갈기고 나서『너 이거 어디서 배운 버릇이냐?』고 호통쳤다.
점령군의 높은 콧대만 믿고 한국인에게는 고하를 막론하고 오만 불손해도 괜찮을 줄 알았던 미군부관은 대꾸 한마디 못하고 얼굴이 벌개졌다.
불의를 보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격분하는 것이 창랑의 결점이기도 했지만 그의 개성이기도 했다.
정 판사 사건 이후 공산당에 대한 일제 검거령이 내렸을 때 장택상 수도청장은 한양 여운형 선생의 사돈 이만규씨를 수도청장실로 초청했다.
이씨는 물리학자로 배화여고 교장이었고 창랑과는 옥중 동지여서 서로 우정을 배반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러나 이씨가 공산당으로 기운 이상 그냥 두고 있을 수도 없었다.
수도청장실로 찾아온 이씨를 보고 창랑은『내가 수도청장이라고 해서 내 손으로 자네를 잡아넣을 수는 없네. 자네 사상은 내가 보기로는 고칠 가망이 없어. 그러니 이북으로 가주기 바라네. 자네도 일제하에서 이 나라 독립을 위해 싸운 애국자야. 어서 거기 가서 자네 나름대로 살아보게』하고 월북을 권유했다.
이씨가 월북하겠다는 뜻을 알려오자 장 청장은 부하경찰관을 시켜 이씨를 38선까지 특별 호송해 주기까지 했다.
창랑은 경기도 경찰부장에 취임한 뒤 얼마 안돼 해방 전 청구회 사건으로 자신이 경찰에 검거됐을 때 취조를 맡았던 가창현 경부(현 인천시 남구 숭의2동297)가 경찰에 근무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가씨를 부장실로 불러들였다.
창랑은 가씨가 부장실로 들어서자 옆에 있던 미 고문관에게 영어로 무슨 말인가를 주고받더니 일경에 잡혔을 때 고문을 당해 상처자국이 남아있는 어깨를 미 고문에게 내보였다. 가씨는 자신을 고문경찰관으로 몰아 처벌이라도 하는 줄 알고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창랑은『자네는 그때 나를 발길로 차고 괴롭혔지만 직무를 수행하는 열의는 대단하더군. 쓸만한 친구야』하고 돌려보냈다. 그 뒤 얼마 안돼 창랑은 가씨를 경감으로 승진시켜 주면서 종로경찰서장을 맡으라고 권했다.
그러나 일제 때 고등계에 근무하면서 본의 아니게 사상범들을 다루지 않을 수 없었던 가씨는 서울시내에서 근무하기가 양심상 허락치 않아 수원서장을 하겠다고 말해 발령을 받았다. 창랑은 가씨를 특진시키면서『그 당시 환경이 어쩔 수 없었고 또 자기직책을 완수했다는 것은 어느 시대나 높이 평가해야 한다』고 격려하여 전 경찰관의 직업의식을 고무해 주었다. 이 일로 해서 가씨는 그 뒤로 창랑과 가까와졌고 창랑의 부인과 의남매를 맺기까지 했다.
내가 그후 수도청장으로 있을 때 가씨는 수도청 정보과장으로 함께 일했는데 그는 참으로 양심적이고 사명감이 투철한 경찰관이었다.
장택상 수도청장이 재임하는 동안 장안에는 수도청장의 포고문이 수없이 나붙었다. 요즘 같으면 간단한 지시로 끝날 문제도 그때는 모두 포고문을 만들어 길거리 담벼락에 내다 붙였다.
46년4월17일에는『전차에 매달려 가는 행위를 철저히 금지한다』는 내용의 포고문이 장택상 수도청장의 이름으로 나붙었다. 이 포고문은『전차에 매달려 가는 것은 보기에도 나쁘고 위험도 하니 강력히 단속한다』는 내용이었다.
또 그보다 앞서 그해 2월20일에는 기생의 영업에 관한 포고문을 발표했다. 창랑은 이 포고문에서『최근 각 요정에 출입하는 기생은 면허제가 아닌 탓으로 그 수가 너무 많아 풍기상 좋지 않다』고 지적하고『앞으로는 시내 3개권번에서 시험을 실시, 가무를 못하는 기생은 전부 영업을 중지시키겠다』고 발표했다.
또『일정한 시간을 한 방에서「서비스」해야 할 것인데도 이방 저방으로 돌아다니며 4중·5중으로 화대를 청구하는 이른바 개평기생도 발견되는 대로 취체하리라』고 했다.
장택상 수도청장의 종횡 무진한 활약은 많은 일화를 남기면서도 혼란한 시국을 수습하는데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튼 업적을 남겼다 할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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