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 정치적 고립 속의 성장|신성순 특파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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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세계 지도에 그려진 대만의 위치와 모양을 보면 태평양 물결에 밀려 「아시아」 대륙에까지 표류한 한조각 나뭇잎 같은 인상을 준다.
이런 느낌은 섬의 모양이 나뭇잎 같이 생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71년10월 중공에 밀려 「유엔」에서 물러나고 다시 72년9월 일본과 외교 관계를 끊는 등 가속적으로 진행되는 국제 정치 사회에서의 고립화 때문에 더욱 절실해 지는 것 같다.
그러나 자유중국을 이런 각도에서만 보고 혹시라도 값싼 동정을 느낀다면 천만의 말씀이다. 면적은 우리의 3분의 1인 3만5천평방km, 인구는 절반인 1천5백50만명이지만 대만의 73년 1인당 국민 소득은 우리보다 1백「달러」가 많은 4백69「달러」(한국 3백76「달러」)이며 수출액은 우리 보다 10억「달러」가 더 많은 44억7천3백만「달러」에 달한다.
무역 수지도 우리가 계속되는 역조에 시달리는데 비해 대만은 71년부터 흑자국으로 전환, 73년에는 6억8천2백만「달러」의 흑자를 기록하고 있다 (이런 사정은 금년 3월부터 다시 역조로 반전, 6월말 현재 5억7천만「달러」의 적자를 기록했다).
GNP 성장율도 72년 10·7%, 73년 12·3%로 우리보다는 뒤지지만 고도 성장을 지속하고 있다.
최근 유류 파동으로 우리처럼 물가 파동을 겪긴 했지만 물가가 상대적으로 안정되고 치안이 잘되어 있는 점등 우리로서는 오히려 부러운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국제 사회에서 고립되고 있다고 하지만 대만 지역에 대한 외국인 투자는 「유엔」 탈퇴나 대일 단교에 관계없이 계속 증가 추세다. 자유중국이 「유엔」서 탈퇴하던 71년의 외국인 투자 건수는 44건으로 전년의 71건보다 줄었으나 투자액은 1억2천5백만「달러」로 전년의 1억9백만「달러」보다 증가했다.
일본과 외교 관계가 끊어진 72년에도 투자액은 1억「달러」로 전해보다 다소 줄었으나 건수는 52건으로 오히려 늘었으며, 73년에는 급상승 추세를 보여 외국인 투자 건수 1백50건에 투자액은 1억9천3백만「달러」에 달하고 있다.
특히 주목할 것은 일본 자본의 대만 진출인데 68년 96건 (1천4백85만 「달러」)을 「피크」로 점차 감소 경향을 보여 외교 관계가 단절되던 72년에는 26건 (7백72만「달러」)에 그쳤던 일본의 대 대만 투자가 73년에는 92건에 4천4백만「달러」라는 전례 없는 높은 실적을 보였다.
올 들어도 7월말 현재 이미 32건 2천7백만「달러」의 일본 자본이 투자됐다. 이런 사실은 일본의 정경 분리 원칙과 자유중국의 정치와 경제를 따로 생각하겠다는 방침이 일치한 결과라고 평할 수 있겠는데 어쨌든 대만에 발을 들여놓고 보면 지도를 볼 때와는 달리 고립감은 훨씬 해소된다.
대만이 외교상의 고립 추세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인 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던 이유나 배경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를 들 수 있다. 이념적으로는 손문의 민생주의를 대만에서 실천에 옮긴다는 이상아래 정부가 시의에 맞는 경제 정책을 실효성 있게 추진해 왔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경제 성장의 밑거름이 된 구체적 조치 가운데 현지에서 거론되는 것이 ①농지 개혁과 사후 관리의 성공 ②경제 개발 계획의 조기 착수 ③외자 도입으로 부족한 재원 조달에 성공 ④정경 분리 방침 (이것은 공적으로 시인되는 것은 아니다) ⑤장기간의 물가 안정과 자원의 혜택 등이다.
경제 계획은 우리가 62년에 l차 5개년 계획의 실시에 들어간데 비해 대만은 10년이 앞선 53년에 제1차 4개년 계획에 착수했으며 52년에 화교 자본의 국내 도입, 53년에 외국 자본의 국내 도입을 시작했다.
정경 분리 원칙은 일본 자본의 도입뿐 아니라 일본과의 교역에서도 알 수 있다. 자유중국 정부는 72년 대일 단교 후 2만「달러」 이상의 대일 수입품은 수입 선을 구주로 돌리도록 지시한 일이 있으나 대일본 수입액은 71년의 3백31억 신 대폐 (1「달러」=38 신 대폐)에서 72년에는 4백19억 신 대폐로, 73년에는 다시 5백46 신 대폐로 증가 추세다.
물가는 62년이래 72년까지 연간 상승율 1·7∼3%의 안정세를 보였으며 2∼3모작으로 쌀 생산량이 많아 쌀값은 60kg들이 한 가마에 우리 돈으로 9천원 수준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대만의 관민이 가장 자랑하는 것은 소위 「경자유기전」의 원칙에 입각한 농지 개혁.
대지주의 지대를 공장의 출자 증권으로 보상, 토지 자본을 산업 자본화했다는데 특징이 있다.
또 지권 평균의 방침에 의해 지가 상승에 따른 소득을 세금으로 흡수, 부동산 투기의 여지가 없도록 했는데 69, 70년에 걸쳐 전국적으로 지가 신고를 받았다.
그러나 이처럼 「와신 상담」, 애써 이룩한 대만 경제도 국제 「인플레」와 석유 파동, 경기 후퇴 등 국제 경제 여건의 악화로 작년 하반기부터 적지 않은 시련에 부닥쳤으며 대만인과 본토 인간의 보이지 않는 불화·인력 유출 등 끊임없는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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