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3.0 속 뜯어보니 ‘정부 0.3’ 수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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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1호 01면

“황당했죠. 공공데이터법이 시행됐는데도 PDF 파일만 제공할 수 있다니요.”

창조경제의 기초, 공공데이터 허와 실

벤처회사에 근무하는 이종훈(38)씨는 지난해 일을 떠올리면 쓴웃음부터 나온다.

지난해 7월 이씨는 ‘공공데이터법(공공데이터의 제공 및 이용 활성화에 관한 법률)’이 제정됐다는 뉴스를 보고 눈이 번쩍 뜨였다. 정부가 보유한 방대한 공공데이터를 무료로 받아 상업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11월 초. 법이 시행되자마자 이씨는 문화체육관광부에 자료를 요청했다. 그가 구상했던 사업 아이템은 인터넷 문화지도. 컴퓨터나 스마트폰으로 전국 박물관과 미술관 등 문화시설을 손쉽게 찾아볼 수 있는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문체부 홈페이지에 ‘전국 문화시설기반 총람’이란 자료가 올라와 있는데 이걸 지도 제작에 활용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학부모와 아이들이 쉽게 찾아갈 수 있도록 말이죠.”

하지만 결과는 이씨의 기대와 달랐다. 문체부는 자료를 PDF 파일로만 제공할 수 있다고 했다. PDF 파일은 일종의 그림파일이어서 자료를 받더라도 그 안에 담긴 데이터를 ‘전자적으로’ 활용할 수 없다.

“민감한 정보도 아니고 공공데이터법까지 시행된 마당에 쉽게 가공할 수 있는 엑셀 파일을 줄 수 없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어요. ‘정부 3.0’의 취지까지 설명해가며 ‘API(응용프로그램 프로그래밍 환경) 형태로 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항의했더니 담당 공무원은 ‘API가 뭐냐’고 되묻더군요.”

API(Application Program Interface)란 컴퓨터에서 구동할 수 있는 데이터 형태를 말한다. 공공데이터법은 수정·변환이 가능한 데이터를 제공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국민들이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답답해진 이씨는 한국정보화진흥원에 도움을 청했다. 공공데이터법의 취지를 알고 있는 정보화진흥원은 문체부에 공문을 보내 가공 가능한 데이터를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한참 만에 돌아온 답변은 ‘자료 공개했음’ 한 줄뿐이었다. 왜 수정·변환 가능한 데이터를 줄 수 없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이씨는 결국 엑셀 파일을 받는 것을 포기했다. 지난달 초 아르바이트생을 고용해 PDF파일에 적힌 데이터를 1주일 동안 엑셀 파일로 변환했다.

“돈까지 들여 불필요한 작업을 한 것도 안타깝지만 공공데이터법 시행으로 기대했던 것들이 수포로 돌아간 게 더 허탈합니다.”

지난해 6월 정부는 정부서울청사에서 ‘정부 3.0 비전 선포식’을 열었다.

‘정부 3.0’은 창조경제와 함께 박근혜 대통령의 핵심 공약 중 하나다. 정부가 일방적으로 정보를 공개하던 ‘정부 1.0’과 인터넷을 통해 양방향 소통을 하는 ‘정부 2.0’을 뛰어넘겠다는 것. 정부 3.0에서는 무선 인터넷과 모바일 환경을 통해 국민 개개인에게 맞춤형 정보를 제공해 열린정부 실현을 목표로 삼았다. 박 대통령도 비전 선포식에 참석해 “우리 사회는 저출산 고령화와 고용 없는 성장, 양극화 등의 도전에 직면해 있다”며 “정부가 모든 정보를 폐쇄적·독점적으로 관리하는 기존의 방식으론 시대의 변화에 부응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야심 차게 출발한 정부 3.0이 제대로 가동되고 있다고 믿는 전문가는 거의 없다. 주무부처인 안전행정부와 각 정부부처, 기관 사이에 정부 3.0의 개념 공유조차 제대로 돼 있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바른사회시민회의 김영훈 경제실장은 “현재 295개 공공기관 가운데 정부 정보공개 시스템에 등록조차 하지 않은 기관이 57개나 된다”며 “정보공개에 대한 선언적 수준을 넘어 시행의지를 명확히 하지 않으면 ‘열린정부’ 구현은 공허한 외침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본지가 지난 1주일 동안 문체부, 국토교통부, 여성가족부, 해양수산부 등 4개 정부부처에 공공데이터를 요청한 결과, 원래 취지대로 ‘공공데이터포털(www.data.go.kr)’을 통해 자료를 제공한 곳은 하나도 없었다. 수정·변환이 가능한 파일을 제공한 곳도 1개 부처(해양수산부)에 불과했다.

주무부처인 안전행정부 관계자는 “아직 개별 부처들이 정부 방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며 “앞으로 지속적인 교육과 지침을 하달하겠다”고 답했다. ▶관계기사 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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