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경의 취리히통신] 스위스 수퍼윌리 게임과 한국의 외국인 전용 목욕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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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리히 시내를 걷다 보면 “니하오” 또는 “곤니치와”라고 말을 건네는 사람을 종종 만납니다. 한국 사람들에게 ‘서양인=미국인’이듯, 유럽 사람들에겐 ‘아시아인=중국인, 일본인’이기 때문이죠. 썩 유쾌한 경험은 아니지만 이 정도면 양반입니다.

 아파트 관리인은 보일러를 손보러 왔다가 “당신 나라에선 개를 먹고 서로 총을 쏜다면서요?”라고 물었습니다. 스페인에선 한국인을 처음 만난다는 제 또래의 스페인 여성에게서 “한국에선 짚으로 지은 집에 살지?”라는 질문을 받았죠. 두어 해 전 스위스 병원에서 아기를 출산한 날, 독일어를 하는 간호사에게 “영어로 말해 달라”고 했다가 “왜 독일어를 안 배우느냐. 스위스의 의료서비스를 받으려면 그 정도는 해야 한다”고 된통 혼이 나기도 했습니다.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겪었던 일이 압권인데요, 호텔 카지노의 딜러가 느닷없이 자기와 결혼하자는 겁니다. 알고 보니 미국 시민권을 얻으려는 아시아 여성이 법적 혼인 절차가 간소한 라스베이거스에서 미국인에게 돈을 주고 위장결혼을 하는 일이 종종 있는 모양이었습니다.

 나열하자면 끝이 없습니다. 수위는 다르지만 모두 인종차별입니다. ‘너무 예민한 거 아니야?’라고 생각한다면, 당신도 잠재적 레이시스트(racist·인종차별주의자)입니다. 인종이나 국적과 관련된 발언이나 행위가 누군가에게 모욕감을 준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최근 서울의 한 대형 찜질방이 ‘외국인 전용 세신실’이라는 공간을 만들면서 인종차별 논란에 휩싸였죠. ‘외국인과 같은 공간에서 목욕하는 걸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찜질방 측이 내세운 이유라는데요. 제가 유럽과 미국에서 겪은 차별이 ‘손도끼급’이라면 이 찜질방의 사례는 ‘핵폭탄급’입니다.

 800만 인구 중 200만 명이 외국인인 나라, 지금도 다른 유럽연합(EU) 국가로부터의 이민이 끊이지 않는 나라 스위스에선 요즘 흥미로운 일이 벌어지는 중입니다. 최대 정당인 스위스국민당(SVP)이 외국 이민자 수를 제한하자는 법안을 제출해 9일 국민투표가 실시되는 겁니다. 스위스국민당은 “외국인들이 스위스 국민의 일자리를 빼앗고 사회질서를 어지럽힌다”고 주장합니다. 기업·경제단체 등은 “외국인 근로자 수가 줄어들면 스위스 경제가 직격탄을 맞는다”고 반박하고요.

 이 와중에 한 온라인 게임이 등장했습니다. ‘수퍼윌리(Superwilli)’라는 이 게임의 주인공은 스위스의 전설적 영웅 빌헬름(윌리) 텔. 윌리는 사과를 먹으며 검은 양과 군홧발 등 각종 장애물을 넘어야 합니다. 가까스로 목적지에 도달하면 구멍 뚫린 상자가 나타납니다. 이번에 실시되는 이민제한법안 투표함이죠. 여기에 ‘X’라고 표시된 반대표를 집어넣어야 그의 모험이 끝납니다. 한국의 전경련과 비슷한 단체인 ‘이코노미스위스(economiesuisse)’가 만든 이 게임은 공개된 지 하루 만에 페이스북에서 8만 명 가까이 내려받으며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지요. 스위스 최초의 ‘정치적 게임’인 수퍼윌리의 성공은 이민 이슈가 얼마나 뜨거운 감자인지 짐작하게 합니다.

 인종차별은, 비유하자면 단것을 좋아하는 습성과 비슷합니다. 낯선 이를 경계하고 집단 밖으로 내쫓으려 하는 건 인간이 진화하는 과정에서 안전하게 살아남기 위해 유전자에 새겨진 본능이죠. 먹을 것이 부족했던 원시시대에 단맛이 나는 에너지원을 좇았던 것처럼요. 그러나 본능이 늘 옳은 건 아닙니다. 21세기에 건강한 사회를 이루기 위해선 제 집단 밖의 낯선 것을 받아들여 함께 어울려야 합니다. 당뇨나 비만 같은 현대병에 걸리지 않으려면 본능이 요구하는 단맛의 쾌락을 물리쳐야 하듯 말이죠.

김진경 jeenkyungki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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