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제8장 「김일성 장군」의 정체|「김일성 장군」에 관한 전설과 증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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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우리는 이제까지 48회에 걸쳐 김성주의 경력이 철저히 날조된 것이었음을 보아왔다. 그러나 역사의 날조자들은 기를 쓰고 김성주를 「김일성 장군」으로 선전하며 김성주를 빼고는 「김일성 장군」으로 불렸던 사람이 없었던 양으로 주장함으로써 예부터 우리 민중사이에 전해오던 항일투쟁의 상징, 「김일성 장군」의 전설적 「이미지」를 송두리째 가로채는 용의주도한 심리전술까지 부려왔다. 이 근래에 와서는 김성주를 「전설적 영웅」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는 「김일성장준」의 전설을 시인하되 그게 바로 김성주에 관한 전설이었다고 주장하기 위한 또 하나의 술책일 것이 뻔하다.

<전설마저 도용한 김성주>
그러나 저들이 아무리 교묘하게 술책을 부린다 하더라도 옛 「김일성 장군」에 관한 소문이 나돈 것은 1907년 의병 때이며 더욱 자자해지기로는 3·1운동 후 수삼년 동안이었으니 3·1운동 때만 하더라도 7세밖에 안되었던 김성주가 당시의 「김일성 장군」일 수 없을 것은 재언을 요치 않는 일인 것이다.
옛 「김일성 장군」은 전설의 주인공답게 그의 정체를 알릴만한 기록을 남기지 않고 있다.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아직 우리가 기록을 찾아내지 못한 것일 것이다.
필자는 이 「김일성 장군」의 보존여부와 그 정제를 규명하기 위해 65세 이상 70대의 사람들 수십 명과 기억력이 아주 좋은 80대의 사람 10여명, 그리고 부형들로부터 이야기를 들었다는 40, 50대의 사람 20여명으로부터 옛 「김일성 장군」에 관한 얘기를 증언으로 들어보았다. 이를 요약하면 마음과 같다.
ⓛ김일성 장군은 1907년 의병 때부터 1920년대 전반까지 활약했다.
②김일성 장군은 3·1운동 직후부터 20년대에 활약했다.
③그는 백두산을 근거로 무장 항일투쟁을 했으며 간단없이 한만 국경을 넘나들며 왜놈과 친일 앞잡이를 도살했다.
④그는 신출귀몰하는 전법으로 각지에 출몰했기 때문에 일제는 끝내 그의 정체를 몰랐다.
⑤그는 축지법을 썼으며 산중과 삼림을 백마를 타고 번개같이 날아 다녔다.
⑥그는 한때 만주의 어느 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할 때 자신이 「김일성」이라는 쪽지를 남겼다. 왜경들이 부랴부랴 수색에 나섰으나 허당이었다.
⑦일제때 제일 유명한 항일무사는 김일성·김좌진·홍범도 등 장군이었다. 김일성 장군은 지금 살았다면 80세도, 90세도 훨씬 넘을 것이다.
⑧그의 출신지는 함남 단천이다.
⑨그는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이다. 그의 비범한 용병술과 기마술은 일군을 꼼짝 못하게 했다.
⑩그는 일본육사를 다닐 때 장차를 기약하고 사진한잠 남기지 않았다. 학교에서 전체사진을 찍을 때는 모자를 푹 내려써 얼굴을 분간할 수 없게 했다.
이밖에도 여러 사람들이 1937년6월4일 밤의 보천보 습격이 「김일성 장군」의 거사라고 기억하고 있었는데 이는 사회에서 밝혔듯이 이름이 같은데서 온 착각이었다.
증인들은 「김일성 장군」의 한자명이 일성인지 일성인지 또는 일성인지 아니면 일성인지를 잘 몰랐으며 그저 음독으로 「김일성 장군」으로만 알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더러는 일성으로 또 더러는 일성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대체로 이상과 같은 여러 갈래의, 그리고 극히 단편적인 이야기들이 옛 「김일성 장군」에 관한 전설의 줄거리를 이루고 있다.
모든 증인들이 「김일성 장군」이란 항일투사가 분명히 있기는 있었는데 자기와 자기 부대, 그리고 가족들 보안을 위해 끝내 정체를 밝히지 않고 투쟁만 하다가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개별적 면접의 소상한 보고는 지면관계로 생략한다.

<축지법 사용·신출귀몰>
옛날에 「김일성 장군」이란 항일투사가 있어서 소위 「치안의 밤」이 되었다고 증언하는 사람은 일본에서도 여럿을 만날 수가 있었다. 3·1운동을 함남 북청군청 재직시에 겪고 이듬해 함흥순사 교습소 교관으로 전근했던 공등삼차낭(동경의 재단법인 우방협회 이사로 있다가 1970년 봄에 77세로 사망)은 1968년 여름 필자에게 3·1운동 후 함남 국경지대의 치안유지상 가장 골치 아픈 존재는 무장독립군 김일성 부대였는데 キソテツセイ(김일성)라고도, キソイツセイ(김일성)라고도 불렸다고 증언했다.
1970년 83세였던 백석종성은 일제때 오남 비료공장의 기술 책임자였던 사람이다. 그는 1925년에 흥남에서 공장의 입지조건을 조사하고 건설공사를 감독했다. 그는 공장 건설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26, 7년께 경찰관계 사람들로부터 「김일성」이란 사람이 백두산 근처의 한만 국경에서 독립투쟁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백석이란 사람은 공장용지로서 한인소유 논·밭을 사들일 때 접촉했던 주요지주들 이름과 그때의 교섭조건들을 모조리 기억할 정도로 기억력 확실해서 필자를 감탄케 했던 사람이다.
1926년1월에 전남 경찰부장으로 부임해서 1927년4월부터 1929년11월까지는 조선총독부내무국 사회과장으로 있었던 신미일춘은 그의 자택을 찾아간 필자에게 l970년6월에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전남 경찰부장으로 경성에서 열리는 각도 경찰 부장회의에 참석했을 때 삼시 경무국장으로부터 국경 및 인접만주의 치안상태에 대해 설명을 들었는데 그때 김일성에 관한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
삼시는 동북정권과 교섭해서 체포한 독립운동자를 취제하기 위한 삼시협정을 맺었던 바로 그 사람이다. 사회과장이 되어서 재만 한인보호·지도업무를 담당하게 되어 3번이나 만주에 가본 일이 있다.
교포 선무책으로 기록 영화를 순회 상영했는데 이게 대환영을 받아서 먼 곳에서도 구경하러 많은 사람들이 모이곤 했다. 오지의 농민들일수록 사상이 불온하다해서 위험을 무릅쓰고 들어갔는데 그때 길림성 오지에 있는 김일성 부대대원들이 구경하러와서 영화관을 놀라게 한일이 있었다. 이들은 영화관에 위협을 가하지 않고 오히려 재미있게 보았다고 자주 와달라고 부탁까지 하던 것이 지금도 인상깊다. 그때쯤에 이르러서는 삼시협정도 있고 해서 김일성 부대가 큰 활약은 할 수 없었으나 근거지를 확보하고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보안 위해 정체 안 밝혀>
이상의 증언들은 1920년에 한만 국경 또는 만주의 오지에 실재했던 「김일성」부대에 관한 일인들의 증언이다. 그러나 「김일성」이란 항일무사는 1910년대부터 벌써 한국민중들 사이에 널리 알려진 존재였음을 증언해 준 사람은 일제 때에 자원일성 총독의 정책 고문으로 서울에 와서 우이동에 민족 경제문화연구소를 설립, 운영했던 겸전택일낭(81·동경거주)였다. 그는 김성수·송진우등 이 나라의 지도급 인사들과 교제가 잦았고 민족 문제에 관해 일가견을 가졌던 탓으로 당시의 지식인들과 기탄 없는 대화가 되었던 사람이다. 지금도 동경에서 민족문제 연구소를 하고 있다.
그는 또 1950년 5월호 『문예춘추』에 실린 남북한 관계에 관한 글 속에서 한국 동란을 예견한 판단을 제시한 일이 있었는데 그로 말미암아 크게 화제를 불러 일으켰던 사람이다. 겸전은 그가 쓴 『조선신화』(1950년11월 발행)란 책에도 김일성이란 항일투사에 관해 기록하고 있다
일본의 「시베리아」출병 때(1918년∼1922년) 김일성은 일군 및 백군과 싸운 유명한 사령관이었으며 그후 만주로 이동하여 항일투쟁을 계속했는데 이 사람의 존재는 한인들 사이에 대를 이어가며 전달되었던 것이라고 조선신화에서 겸전은 밝히고 있다. 【제자=김홍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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