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베트남평화 교섭의 내막은 이렇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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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6월16일「포드고르니」가「하노이」를 방문중에 있을 때「키신저」는 북경에 날아가 중국수뇌들에게 미·소 정상회담에 관해 설명했다. 주은내와 4시간에 걸친 회담에서「키신저」가 월남문제해결을 위해 열심히 중공의 지지를 얻으려 한 것은 분명하다.
「키신저」는「모스크바」에서는 교섭당사자로 행동했지만 북경에서는 솔직한 철학자 행세를 했다. 그는 주에게 만약 미국이 중공의 친구가 될 수 있다면 미국은 동시에「하노이」의 친구가 될 필요가 있다고 역설했다.

<"왜 역사를 두려워하나">
그는「하노이」가 꽤 역사를 두려워하는가, 왜「하노이」는 전 역사과정을 2단계로 나누어 생각할 줄 모르는 가라고 주에게 물었다. 제1단계는 미국의 개입중지이다. 그렇게되면 역사는 월남에서 스스로가 취할 방향을 찾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주는 월남문제의 외교적 타결에 대해 많은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중공이 그후 큰 공헌을 했다는 증거가 있다.
7월 중순이 되자 월남교섭을 둘러싼 조용하지만 낙관적인 분위기가 싹트기 시작했다. 「하노이」는 7월19일로 예정된「키신저」·「토」의 비밀회담일정에 합의, 「키신저」는 교섭이 또 한번 본궤도로 되돌아오고 있는지 모른다고 느꼈다. 이 회담에서 양측은 종래의 입장을 되풀이했지만 앞으로 계속 접촉을 유지하기로 합의했다.
「토」와 회담 뒤「키신저」는 직접「사이공」에 날아가 보다 커다란 문제를 품고있는 전혀 다른 종류의 외교를 전개했다.
「사이공」에서 나온 문제는「티우」에게 월남문제해결을 위한 준비를 시키는 것이었다.
여기서「키신저」노선은 미국에 대통령선거가 임박했다는데 주의를 환기시키고「닉슨」정부로서는 평화외교를 준비할 필요가 있으며「맥거번」상원의원의「사이공」정부가 평화에 장해가 되고있다는 주장을 저지해야한다고 강조했다.

<강경한 티우 설득에 큰 골치>
「키신저」는「티우」에 대해『그 때문에 결과적으로「닉슨」정부는 정치적 현실의 문제로서「하노이」가 거절할 것을 잘 알면서도 겉보기에 매력적인 제안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때「키신저」는 소련에 제시했던 3자 합동선거위에 대해서는 아무런「힌트」도 주지 않았다. 「키신저」는 이 자리에서「티우」에게 미국선거만 끝나면 그 뒤는 또『별도로 이야기한다』고 통고했으며, 특히 선거 후에는 월맹으로 진공하는 계획을 세워두는 것이 좋다고까지 제언했다.
미리 말해두지만「키신저」의 이런 자세는 그 나름의 논리가 있고 그대로의 문맥이 통하고 있었다. 72년의 공산군춘계대공세로 그는 월남전은 가능한 한 빨리 끝내고 미국은 월남에서 발을 빼야한다는 확신을 하고 있었다. 「키신저」는「사이공」에서「캘리포니아」로 가는 비행기 속에서 그의 보좌관에게 이렇게 말했다. 『한가지만은 확실하다. 우리는 앞으로 또 4년간을 이런 문제로 골치를 썩힐 수는 없다. 그러므로 만용을 부려서라도 매듭을 지어야하지 않겠는가.』
「키신저」는 자기 나름의 논리에 따라「하노이」와 회담을 추진하기 위해 8월1일, 15일 2회에 걸쳐「토」와 개인적인 회담을 갖는 한편「헤이그」를「사이공」에 보내 미군철수의 가속화와 3자 합동위원회에 대한「티우」의 의사를 타진케 했다.
「티우」는 강경했다. 그는 월남국토의 90%를 장악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3자 합동위는 필요가 없고 그러한 위원회가 연립정부로 발전해 갈지 모른다고 염려했다.
「헤이그」로부터「티우」와의 교착상태를 타개할 수 없었다는 보고를 받은「키신저」는 교섭을 계속 추진하기 위해「모스크바」를 다시 방문하는 한편「벙커」주월 대사에게「티우」를 설득시키라고 지시했다.
9월l5일「토」와의 회담을 앞둔「키신저」에게「벙커」대사는「티우」가 3자 합동위를 거부했다는 전보를 보내왔다. 「키신저」는 흥분해서 한밤중에 방안을 이리저리 돌며 지금 당장「티우」의 태도를 추궁하기 위해「사이공」으로 가겠다고 소리내어 말했다.

<일방적 결론 내릴 때라고 판단>
그러나 미국이 일방적으로 결단을 내릴 때가 왔다는 결론에 도달한「키신저」는 9월15일 회담을 마친 뒤「워싱턴」에 귀임, 기자회견을 갖고 신중한 낙관론을 피력했다.
1972년10월8일 월남평화교섭에 드디어 대망의 돌파구가 열렸다. 「파리」교외「프랑스」공산당소유의 별장에 도착한「레·둑·토」는 즉각 휴전·미군전면철수·미군포로 60일내 송환 등 휴전안을 내놓고 10월31일 조인을 제의했다. 「워싱턴」으로 돌아온「키신저」는 이제 사태를 완전히 낙관했다. 그는 10월19일부터 23일까지「사이공」에 가서「티우」의 마지막 양해를 구한 뒤 10월24일「하노이」로 날아가 협정에 가조인한 뒤 10월31일「파리」에서 4개국 외상에 의해 정식 조인할 계획이었다. 「키신저」는「설리번」과 함께 19일 아침「사이공」에 도착했다. 협정문안의 대부분은「벙커」대사도 거의 몰랐고「티우」에게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키신저」는 3일이면「티우」의 동의를 얻어낼 수 있다고 자신만만했다. 하오3시「키신저」는「티우」와 대통령 관저에서 3시간 30분 동안 회담했다. 「티우」는 이때 처음으로 평화협정의 초안이란 것을 보았다. 그것도 영어로 작성된 것이었다.
「티우」는 열화와 같이 분노했다. 특히 그에게 배알이 꼴리는 일은「키신저」가 사흘 후「하노이」에서 가조인 한다는 문서에 대해 한번도 상의를 한 적이 없었다는 점이었다.

<미가 제시한 조건대로 타결>
그는「함정에 떨어진 호랑이」처럼 행동했다. 휴전을 받아들일 용의가 없으며 미국이「인도지나」전역의 휴전요구를 포기하고 월남에 한정된 휴전에 찬성한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티우」는 말했다. 회담은 날이 갈수록 험악해지고「티우」는 편집광처럼 날뛰며「키신저」를 비난했다.
「키신저」는「티우」에게『우리는 북경에서 성공하고「모스크바」에서 성공하고「파리」에서도 성공했다. 여기서도 잘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티우」의 외교정책고문「호안·독·냐」는 반문했다. 『지금까지 미국이 많은 분야에서 성공을 거둔 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가 미국이 이곳에서도 장차 성공하리라고 예언하는 것은 아니다.』 결국「키신저」는 10·31협정조인계획을 포기하고 의기소침해서「워싱턴」에 돌아왔다.
이제 새로운 위기가 대두했다. 월맹은 국내의 정치목적을 위해 자기들을 이용하고「파리」에서 성립된 합의를 뒤바꾸려 한다고 결론지었다. 「키신저」는 이 점을 염려하여「닉슨」의 양해아래『평화는 눈앞에 다가왔다』라는 연설을 하여 한쪽으로「하노이」를 안심시키고 다른 쪽으로는「사이공」의 주의를 촉구하려했다.
그후 수 차례의 협상이 있은 후 12월25일「레·둑·토」는 미국의 입장에 거의 접근한 새로운 제안을 했다.
73년1월에 들어와 교섭은 재개되고 기술적인 의미에서 1월 13일 대개 미국이 제시한 조건으로 협정은 타결되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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