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중)베트남 평화 교섭의 내막은 이렇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72년 1월 20일께 백악관은 월맹측이 군사 공세를 준비하고 비밀 회담 재개에 대해 계속 침묵을 하자 10월의 평화 제안을 공표하기로 결정했다. 이것은 「닉슨」 정부가 월남 평화를 진정으로 다루지 않고 있다는 비판에 반격을 가하려는 「내수용」 발표였다.
1월 25일 「닉슨」 대통령은 전국을 향한 극적인 연설에서 「키신저」 비밀 외교 여행의 경과를 발표했다. 연설 다음날 백악관은 비밀 회담을 재개할 용의가 있다는 「메시지」를 「하노이」에 보냈다. 이때부터 양측은 공개적으로 논쟁을 벌이며 서로의 속셈을 읽느라 시간을 허비하기 시작했다.

<주소 대사 모른 키신저 방소>
「하노이」측이 미국에 대해 공개 석상에서의 비난을 강화하면서 비밀 교섭 재개에 대해 지연 전술을 쓴 것은 3월 30일 춘계 대공세를 개시한 것으로 설명할 수 있겠다. 공산군의 대공세로 4월에 「쾅틴」이 함락하자 백악관에는 대규모적인 개입이 부득이하다는 생각이 강력하게 대두했다. 백악관의 최대의 문제는 5월로 예정된 「모스크바」 정상회담의 가능성을 파괴하지 않고 월남에서 결정적인 행동을 취하느냐는 것이었다.
「닉슨」은 「브레즈네프」의 의향을 탐색하고 「하노이」의 공세를 중지시키기 위한 「브레즈네프」의 지지를 얻을 목적으로 「키신저」를 「모스크바」에 파견했다. 4월 20일 「키신저」의 「모스크바」 방문은 완전히 비밀리에 이루어졌다. 「키신저」를 태우고 「앤드루즈」 공군기지를 떠난 공군기는 「모스크바」 근처의 국내선용 비행장에 착륙했다. 여기서 소련 정부의 「리무진」을 타고 약 45분 거리에 있는 「레닌」 언덕의 「톰프료마」라는 저택에 도착했다.
「키신저」는 마지막날 「크렘린」궁 비밀 방문을 제외하고는 이 집에서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닉슨」 방소 준비차 「모스크바」에 와 있던 미국 대표들은 물론 주소 미대사 「빔」조차도 이 사실을 몰랐다. 이 저택에서 길 하나를 사이에 둔 「브레즈네프」의 별장에서 여러 차례 회담이 열렸다.

<소, 미제의 즉각 월맹에 전달>
소련측은 「브레즈네프」와 「그로미코」 외상, 「도브리닌」 주미 대사만이 참석했다. 「브레즈네프」와의 이 회담이 월남 문제 교섭 사상 최초의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키신저」는 미국이 현상대로의 휴전을 수락할 용의가 있다고 말하고 그 교환조건으로 3월 30일의 대공세 이후 월남에 투입된 월맹군의 철수를 요구했다. 이것은 분명히 외교적 폭탄선언이었다. 미국은 지금까지 한번도 월맹군이 월남에 남아있는데 동의하지 않았었다. 「키신저」가 「브레즈네프」에 통고한 것은 요컨대 공세가 시작되기 전 월남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10만명의 월맹군 철수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브레즈네프」는 미국의 새로운 입장을 「하노이」에 전달하는데 동의했다. 「키신저」가 「워싱턴」에 귀임한 뒤 곧 「워싱턴」에는 「하노이」측이 5월 20일 「파리」에서 비밀 회담에 응할 용의가 있다는 취지의 보고가 왔다.
그런데 그사이 월남의 군사 정세는 불리하게 되었기 때문에 「닉슨」과 「키신저」는 월맹에 대한 보복을 계획했다.
그것은 「하노이」 「하이퐁」 지구 대폭격, 월맹의 전 교통망 파괴, 「하이퐁」항 기뢰 봉쇄였다. 「키신저」는 이 결단을 내리기 전에 크게 고민했다 한다. 그는 마지막으로 폭격과 기뢰 봉쇄 필요를 스스로에 납득시켰다.

<「겁주고 달래는 정책」 밀고 가>
국가안보회의에서 「로저즈」 국무·「레어드」 국방은 북폭에 반대했고 「존·코널리」 재무는 강경하게 보복의 필요를 지지했다. 그는 대통령을 손가락질하며 『만약 당신이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대통령으로 불리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외쳤다.
「닉슨」은 회의가 끝난 뒤 곧 작전 개시를 군에 명령했다. 이것은 『겁주고 달래는』 정책의 일환이었다. 「닉슨」 정부는 도박에 승리했다. 소련은 정상회담을 취소하지 않았다. 「닉슨」은 「브레즈네프」역시 전쟁 해결에 한몫 끼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알고 「모스크바」로 갔다.
미·소의 두 수뇌는 월남에 대해 네 차례 회담했다. 제1차 회담 중 「코시긴」 소 수상은「닉슨」을 향해 『당신에게는 「키신저」라는 유능한 부하가 있지 않습니까? 그는 유능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그에게 전쟁 해결을 위한 올바른 해답을 맡기지 않습니까』라고 말했다. 월남에 대한 두 번째 회담은 「키신저」와 「그로미코」 외상 사이에 「크렘린」궁에서 5월 25일에 열렸다. 여기서 「키신저」는 2개의 외교적 폭탄을 터뜨렸다. 「키신저」는 우선 미국의 북폭은 반드시 미군 포로가 송환될 때까지 계속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오후의 회담에서 터뜨린 「키신저」의 두 번째 폭탄은 그가 갑자기 월남의 정치 정세라는 「테마」를 화제로 삼았던 것이다.
그때까지 미국은 정치 문제와 군사 문제를 별도로 취급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키신저」는 미국이 월남에서 3자 합동 선거 위원회를 지지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3자란 「사이공」 정부·「베트콩」 및 중립파이다. 이것은 미국의 자세를 크게 바꾼 것이었다. 미국은 지금까지 일관하여 3자 위원회를 반대했는데 그 이유는 이러한 위원회가 연립 정권으로 이어질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공식 입장에 유연성 보여>
71년 10월의 비밀 제안에서 월남의 모든 정치 세력을 망라한 『독립된 기관』을 구성, 선거를 관리한다고 했지만 그것은 3자 합동 위원회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로미코」는 놀란 나머지 『당신이 지금 말한 것은 틀림없겠지요. 내가 잘못 들은 것은 아니겠지요』라고 거듭 물었다. 「키신저」는 『틀림없읍니다. 나는 3자 위원회를 말한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키신저」-「그로미코」 회담의 최종적인 효과는 미국이 소련에 대해 통고한 미국의 비공식 입장이 공식적인 입장보다 유연성이 무한히 풍부하다는 사실을 밝힌 점이 있다. 그것은 월남에서 월맹군의 존재, 포로 석방 전에 폭격 중지용의, 3자 합동 위원회 지지를 포함하고 있다. 「키신저」는 「티우」 배제라는 한가지 점을 제외하고는 「하노이」의 주장에 서서히 접근, 그후 궁극적인 해결을 가져오게 할 기초를 쌓아 올려 가고 있었다.
5월 30일 월남에 대한 최종적인 회담이 「닉슨」, 「브레즈네프」사이에 행해지고 소련 측은 가능한 한 빨리 「키신저」가 제시한 관점을 「하노이」에 전달하기로 합의, 「포드고르니」 최고 회의 간부회 의장이 「하노이」를 방문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