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스물네돌 통일촌서 되새기는 격전의 그날|분단의 철책 옆에 풍요의씨앗 뿌리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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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철원=이두석기자】6·25 스물네돌. 폭탄이 작렬했던 격전지, 귀농선 이북 버려진 땅에 실향민의 마을이 들어섰다. 분단의 철책을 이웃한 이마을의 이름은 통일촌. 지금은 평화의 시앗을 뿌리고 풍요를 거두기위한 일손이 바쁘지만 새벽녘 마을의 고요를 깨뜨리고 불더미로 만든 침략의 그날만은 잊지못한다.
강원도철원군근북면유곡리.
영탄강건너 옛금화군 「느릎실」 부락에 휴전후 21년동안 무성했던 잡초를 말끔히 없애고 원색의 기와가 반짝이는 근대마을이 6·25를 지켜본 실향민과 제대장병, 그리고 이곳을 지키는 장병들의 순으로 건설된 것이다.
금화벌 격전의 상혼을말끔히 씻고 새모습을 드러낸 유곡리 통일촌은 73년8월 첫삽질을 한후 황무지 25만2천평을 논밭으로 개간했고 단독주택 60채가 세워졌으며 첫수확으로 지난해 가을 콩 5백가마와 쌀2백가마를 거둬들였다.
이통일촌은 정부의 민통선북방지역 개발계획에 따라경기도파주군군내면공덕리와 함께 조성된 80년대농촌형부락.
15평 크기의 집과 학교(건평1천평)·마을회관(20평)·구판장을 비롯, 목욕탕·이발소·보건지소등 공공시설이 들어섰다.
부락민은 60가구2백30명(남1백17명·여1백13명). 가구당 논·밭 각 3천3백평씩 모두6천6백평의농경지를 갖고있으며 과거의 경작방법을 완전히 탈바꿈하여 최신농기구인 경운기를 2가구당 1대씩 확보했다.
장대집씨(31)는 유곡리에서 나서 자란 토박이. 사변으로 고향을 떠난사이 7세의 소년이 지금은 1남의 아버지가 되어 다시옛고향을 찾아왔다.
3천평의 논을가꾸는 입주자중 20가구가 이곳 출신이며 어린시절의 고향을 다시 찾았다고 말했다.
이마을의 주농은 콩재배.
73년7월 상사로 제대, 입주한 새마을지도자 조성규씨(46)는 올해 가구당소득목표액이 70만원이며 이를위해 지난5월말에 콩심기를 모두 끝냈고 6월말까지 모내기를 모두 마칠예정이라고 전했다.
조씨는 6·25때 동부전선에서 싸운 참전용사.
조씨는앞철책선과나란히뻗은 길이 옛금강산행철김임을 알려주면서 마을에 진입로·배수로·용수로가 규격대로 닦아지고 논밭이 바둑판처럼 반듯한것을 자랑했다.
새로 건설된 이부락은 농경지가 넓은데 비해 일손이 모자라 인근 「백골」부대장병들이 농사철 일손을 도와준다. 전초지 병사들을비롯, 지난10일부터 매일2백여명의 병력이 동원돼마을의 모내기를 돕고 있으며 지난3월부터 매일 최전방초소근무 병사들이 콩심기등 농사일을 자발적으로 돕고 있다는것.
마을공동논에서 모내기를 돕는 전준석일병(24·전남광주)은 6·25사변이 터지던해 태어난 사변동이. 6·25를 실감하지는 못하지만 전일병은 올들어 잦아진 적의 도발때문에 밤새 경계를 펴고도 실향민들의 농사일을 돕는것이 보람스러워 피곤을 느끼지않는다고했다. 이부대장병들은 부대영농과 하사관농장일을 제쳐놓고 격전지에 들어선 통일촌 부락민 돕기에 일손이 더욱 바쁘다.
부락민들은 지난가을 수확으로 「텔리비젼」 수상기9대를 사들었으며 집집마다 「라디오」 1대씩을 구입했고 자봉틀을 들여온 집이 32가구나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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