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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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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어느 고사에서 이조시대의 벽화가 발견되었다. 경북 안동군의 봉정사 대웅전에 있는 탱화(정화)『영산회도』.
「영산회」란 석가여래가 영취산(영취산)에서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 한 모임을 말한다. 영취산은 인도중부의 「마갈타」국 왕사성의 동북쪽에 있는 산. 이 산에는 신선들이 살고있으며 독수리(취)가 많아 영취산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석가는 여기서 법화경과 무량수경을 강하고 있었다. 그 무렵 석가가 꽃 한 송이를 제자들에게 보여 주었다는 일화가 있다. 그러나 그 뜻을 깨달은 사람은 가섭 혼자 뿐이었다고 한다. 아마 이런 광경을 그린 것이 『영산회도』일 것 같다.
우리 나라에는 벽화가 드물다. 물론 다른 회화들도 귀하지만, 벽화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건축양식과도 관계가 있을 것 같다. 「유럽」의 사원처럼 웅장한 규모나 벽면을 가진 건물들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필경 있었어도 병화를 견디어 내지 못했을 것이다.
오늘날 고화 한 첩, 벽화 한 장면에 깊은 감동을 갖게 되는 것은 우선 그 예술적 가치에 앞서 희귀성 때문이기도 하다. 역사상 잦은 병화는 누구에도 그런 것들을 간수할 마음의 여유를 주지 않았을 것 같다. 가까이 우리는 동란을 겪으면서도 그런 경험을 했다. 「프랑스」 의 「루브르」박물관만 해도 『속은 텅 비어있다』는 속어가 있다. 아름다운 가구·집기·장식 등이 전화로 많이 회진된 것이다.
예술가에 대한 사회적인 예우도 생각할 수 있겠다. 지금은 별세계지만, 옛날의 신분사회에서 화원이란 보잘것없는 지위였다. 임금의 얼굴(어진)이나 그리고, 아니면 왕족, 혹은 궁중 고관의 초상을 그리는 일이 그들의 할 일이었다. 또 서화의 일부인 사군자나 치고 있었다. 산수화도 창의적인 영감의 소산이라기 보다는 모사에 시종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조 때에는 그림에 관한 일을 담당하던 관청이 따로 있었다. 1392년(태조 1년)에 창설된 도화원. 후에 그것은 도화서로 고쳐졌지만, 그 화원들이 하는 일도 창의의 계발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초상화 아니면 풍속도를 그리는 것이 고작이다. 풍속도란 궁중의 무슨 의식을 그린 것을 말한다. 단원 김홍도 같은 기세의 명인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이변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런 안일하게 폐쇄된 예술풍토에선 명작을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나마 현세에 전해지고 있는 작품들은 실로 「진흙 속의 옥」과 같은 존재들이다.
모든 예술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자유분방한 가운데 값있는 작품을 빚어내기 마련이다. 「레오나르도·다·빈치」의 명언이 있다. 『바람이「오르간」의 음을 내듯이 영혼이 그 내면에서 움직여 스스로를 표현한다』.
영혼은 자유로운 가능성의 세계를 의미한다. 오늘의 예술가들은 어떤 상황에서 무엇을 만들어 우리의 후세들에게 남겨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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