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천주교의 맹방 구상-전 국력 사학대회서 최석우 신부(한국교회연구소장)발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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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1일 성균관대에서 열린 제17회 전국역사학 대회에서 한국교회사 연구소장 최석우 신부는「구한말 대외정책과 천주교의 맹방 구상」이란 논문을 발표, 구한말의 친노 배일 정책에 천주교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음을 밝혔다.
최 신부는 구한말 쇄국정책이후 외세의 침략을 막기 위해 한·노·법국 동맹이 진전되었다는 새로운 사실을 밝혀내고 또 천주교가 친로 경향을 갖게된 배경을 아울러 설명했다.
대원군 시대에 방노책의 하나로 한법 동맹론 같은 것이 일시 대두되었던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최 신부는 그 제창자는 천주교가 아니고 대원군 자신이었다는 새로운 사실을 주장했다는 이것은 당시의 「베르네」주교가, 「파리」본부에 보낸 서한에서 분명히 나타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이 한법 동맹론은 실현되지도 못하고 오히려 천주교 탄압으로 돌변하는 계기가 되고만 것이었다.
우리나라에 와있던 천주교 측 「베르네」주교는 대원군의 철저한 쇄국정책에서는 어떠한 외교도 기대할 수 없다고 판단했었고 대원군도 법국(프랑스)의 위력을 겁낼 바 못된다고 생각한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시대의 「베르네」주교는 노국에 대해서 불신적이어서 노국이 통상을 내세우고 있지만 결국은 침략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노국에 대한 회의적 태도가 1890년대의 뮈텔이 주교 시대에 와서는 친로적 경향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노법 동맹이란 사실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지만 하여튼 이러한 천주교의 친노는 당연한 결과로서 배일의 성격을 같이 띄게된 것이라고 최 신부는 설명했다.
「뮈텔」주교의 친로 정책은 노일전쟁을 전후해서 점차 구체화되어 갔고 일본의 침략을 막는 동시에 대한의 주권을 수호하기 위해 노·법 양국의 힘을 빌릴 것에 착안했다. 그래서 그는 성주군수를 지낸 심선택과 전 규장각 직각 신성균을 고종황제에게 추천하여 한·노·법 3국 관계의 일을 구체적으로 추진케 했다는 것이다.
이후 심·신 양인은 수차에 걸쳐 노국 공사「마블로프」에게 서신을 보내 공사가 빨리 귀국 해줄 것과 노국 황제에 전달하여 일본의 침략을 막기 위한 방안을 강구해 줄 것을 청하였었다. 또 「뮈텔」주교도 그들의 서신을 법어(「프랑스」말)로 번역해서 자신의 편지와 함께 상해의 「파리」외방전 교회 지부를 통해 「파블로프」공사에게 전달했고 회신도 받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운동의 소문은 곧 항간에 퍼지고 종현 법국 천주교당이 그 연락처로 알려지게 되었다.
친일적인 신문들은 「뮈텔」주교가 주동하여 한·노·법 동맹을 추진중이라니 헛되고 가소로운 일이라고 비난하면서 조정의 저명인사들이 노법 동맹을 이용하여 친로도 되고 일단 유사시엔 천주교에 피신할 수 있는 호신책도 되어 일석이조의 묘책이라고 야유를 퍼부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천주교인 안중근이 이등박문을 암살한 사건은 천주교가 교인들에게 항일정신을 주입시키고 있음을 일본에 확신시키는 좋은 증거가 되고 말았다.
일본 신문들은 안중근의 범행이 법국 선교사들의 교사를 받은 것이고 또 미국인 「스티븐즈」의 암살도 천주교인의 소행이라고까지 주장했었다.
또 이등은 통감으로 있을때 이미 법국 선교사들이 교인들에게 친로 배일정신을 주입시키고있는 사실을 확신하고 교황「레오」13세에게 재선법국 선교사들을 다른 선교사로 대체해줄 것을 청한 일도 있었다는 것이다.
최 신부는 이와 갈이 천주교가 구한말의 친로 배일사상에 앞장을 서왔지만 안중근의 의거와 한일 합방이 결정적인 전환기가 되어 이후로 천주교는 민족의 자유와 독립운동에 관여할 수 없게 되어 순수 종교영역으로 은퇴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영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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