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戰 초읽기] 상가 일제히 철시 '유령 도시'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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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부터 갑자기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가게들이 전부 철시하고 주유소마다 기름을 사재기하는 차량들이 몰려 마비상태입니다. 관공서 앞에만 쌓여 있던 모래부대(바리케이드)가 어젯밤 우리 사무실 앞에까지 나타났습니다. 길거리에서 참호를 파는 군인들도 눈에 띄게 늘었고요."

17일 전화선을 타고 들려온 바그다드 교민 박상화씨의 목소리는 전에 없이 다급했다.

'비정상일 정도로 정상'이라는 표현이 나올 만큼 평온을 유지해온 바그다드가 16일 오후부터 급속하게 공황상태에 돌입했다. 집집마다 창문에 시커먼 고무테이프가 붙여졌다. 큰 창문과 쇼윈도는 아예 벽돌로 메워졌다. 공습으로 창문이 깨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15일까지 나들이 인파로 북적댔던 중심부의 가라다-인 거리는 이날 상가들이 일제히 셔터를 내려 유령지대로 변했다. 상점 주인들은 "사재기 현상으로 물건이 동났다"고 철시 이유를 밝혔지만 실은 폭도들의 난입에 대비한 조치로 전해졌다.

가라다-아웃 거리에서 가전제품점을 운영해온 사예드 쿠드르는 "냉장고.에어컨 등 가게 물건 1만2천달러어치를 오늘 비밀창고로 옮겼다"고 시인했다.

이날 시내 수퍼마켓들에선 1.5ℓ 생수병 6개들이 팩과 올리브 통조림이 불티나게 팔려 매진됐다. 생수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은 5갤런짜리 누런 플라스틱 물통을 다발로 사들였다. 수돗물이라도 채워넣기 위해서다.

길거리 환전소는 디나르(이라크 화폐) 뭉치를 배낭째 들고와 암달러로 바꾸는 인파로 북적댔다. 환율은 17일 오후 들어 달러당 2천5백디나르에서 2천7백디나르로 급락했다.

요르단.시리아.터키로 이어지는 시외곽 고속도로에는 '○○속셈학원' 같은 로고가 적힌 한국산 중고승합차 행렬이 부쩍 늘었다.

한 외교관은 "24시간 금족령이 내려지기 전에 가족들을 태우고 피란 가는 차량들"이라며 "대부분 차량이 승차인원을 훨씬 초과해 뒷바퀴가 내려앉은 채 달리고 있다"고 전했다. 요르단 암만과 바그다드를 오가는 월경택시들도 대목을 만났다.

팔레스타인 출신 운전기사 모하메드(31)는 "손님이 몰리면서 요금이 하루 만에 1백50달러에서 7백달러로 치솟았다"며 "한몫 잡을 기회여서 전쟁날 때까지 부지런히 뛸 생각"이라고 말했다.

얼마 남지 않은 시내 거주 외국인들도 이날 탈출 대열에 끼어들었다. 독일.중국.시리아 대사관이 철수에 들어간 가운데 CNN 등 극소수 매체를 제외한 외신기자들도 짐을 싸 떠날 채비에 들어갔다.

워싱턴 포스트는 "지난 1년 동안 시민들은 '전쟁이 나도 민간인들의 일상은 유지될 것'이라고 자랑해 왔으나 오늘을 기점으로 바그다드 역시 전시의 공황상태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이 드러났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이라크 국영TV와 신문들은 이날도 "정부가 전쟁회피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뉴스만을 반복했다. 한편 월경택시를 잡지 못해 발을 구르던 朴씨는 이날 오후 9시 가까스로 버스를 임대해 바그다드에 들어와 있던 한국인 인간방패 10여명과 함께 이라크를 빠져나왔다.

강찬호 기자, 외신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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