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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의 종합적 검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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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삼국사기』를 종합적으로 검토하는「심포지엄」이 4일 서울대 문리대에서 베풀어졌다. 진단학회가 주선한 이「심포지엄」에선 이우성(성대) 이용범(동대) 이기문(서울대) 제교수의 발표에 이어 고병익 김완진 변태섭 이기동 교수 등이 토론에 참가했다. 국학계가 처음으로 삼국사기를 여러 측면에서 종합 검토한다는 점에서 주목되는데, 발표 요지는 다음과 같다. 이번「심포지엄」은 삼성문화재단에서 지원했다.

<삼국사기의 구성과 고려왕조의 정통 의의>이우성|신라 중심의 역사 서술|문신정치 이후「고려는 신라 계승」자인
『삼국사기』는 고구려·백제·신라의 3국 정립시대사를 가리킨다. 따라서 삼국사기는 삼국시대의 종결과 더불어 끝나야 할 것인데 7세기 후반에 두 나라가 망한 뒤 2백60여년간 지속된 신라 단독의 역사를 다루어 놓았다. 북쪽 발해의 존재를 외면했다고 하더라도 남쪽만으로도 통일신라 이후는 결코 삼국시대의 연장으로 볼 수 없는 새로운 역사상의 시대가 온 것이다.
그런데 저자 김부식은 이 새로운 시대를 삼국시대와는 달리 새로운 시대사로 다룰 것을 생각지 않고「삼국」속에 그대로 포함시켜 시대사적 특징을 아주 흐리게 해 놓았다.
그런데 신라와 발해는 끝까지 남북이 대치상태에 있었을 뿐 한번도 화합할 수가 없었던 것 같다. 삼국시대로부터의 숙감이 있기도 했겠지만 보다도 당나라의 이간·기미정책에 시종 조종되었던 것이 주요한 이유였던 것 같다.
그러나「남북국 시대」의 뒤를 이어 남으로 신라의 강토를 병합하고 북으로 발해의 민물을 흡수한 고려왕조는 그런 대로 민족통일국가의 성립을 보게 되었고 북진책을 추진하던 그 초기에 있어서의 역사계승 의식을 발해와 더불어 고구려로 줄을 대어 자기 왕조의 정통성을 보증하려 했다.
그러나 고려중기에 와서 삼국사기와 같은 역사서가 나오게 되었을 때는 이미 시대의 분위기가 아주 달라져 있었다.
주로 고구려의 옛 지방 호족으로 구성되었던 건국주체세력과는 달리 신라의 문물과 전통을 긍지로 지녀오는 문신귀족이 정국을 지배하게 되었고 온갖 국가적 모욕을 감수하면서 구안을 도모하는 상황이었다.
삼국사기가 삼국을 동등의 자격으로 다루는 형식을 취했지만 기실 고구려·백제는 질량 모두 부용에 불과하다.
말하자면 삼국사기는 신라 본위·신라 중심의 편찬물이다. 발해를 송두리째 빠뜨리고「남북국 시대」를 부정하고 신라를 고려에 직결시켜 놓은 것이다.
물론 김부식이 신라계 인물이라는 단순한 이유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당시의 역사적 사정으로 보아 반도국가로 만족할 수밖에 없는 고려의 처지가 신라의 계승자로 자인하게 된 것이다.

<삼국사기에 보이는 대외관계 기사>이용범|거의 중국사서 인용·전재|외국전 없고 북방 민족계 기술에 오류 많아
『삼국사기』에 보이는 대외관계 기사를 검토하여 보면 독자적인 것으로서 객관적 신빙성을 인정하여도 좋은 것은 수개조에 지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나마 그 연대에는 의심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특히 백제·신라를 중개지로 하였거나 동해의 해로를 통한 교섭이 입증될 뿐 아니라 광개토왕비에도 싸웠다고 쓰인 왜와의 관계가 고려기에 한건도 보이지 않는다.
뿐 아니라 대련 부근으로 추정되는 사비(수서의「비사」)까지의 요동반도 경략이나 속말말갈의 도읍지 돌지계의 사람들을 요서로 쫓아낸 말갈과의 관계가 중국사서의 단편적 기사를 통하여 겨우 엿보게 할 수 있게 할만큼 대외관계에 있어서는 조략한 내용인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부분적 결점에 비하여 정사로서 결정적인 결점은 중국의 정사체를 그대로 받아들인 점이다. 위서·북주서·요금원 삼사같이 이족으로서 중국의 일부 또는 전역을 통치한 국가의 정사에도 반드시 붙어 있는 외국전을 두지 않아 고려사에도 그 전통을 답습케 한 것이라고 하겠다.
삼국사기에서 중국과 왜에 비하여 가장 다루기 어려운 것은 북방 민족계에 속하는 정치집단과의 관계기사인 것이다.
그들 스스로가 편찬한 사서가 없을 뿐 아니라 이들 제족에 대한 지식의 결핍으로 말미암아 그릇된 기사가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까닭이다.
삼국사기에 보이는 삼국 초의 말갈 기사는 이미 정약용이 동옥저의 예들 가리킨 것이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신라의 지마니사금 14년에서 문무왕 15년까지 55년간 15회를 헤아리는 말갈 기사는 모두 동예인 것이며 백제기의 말갈 기사도 모두가 강원도 지방에 거주하던 동예인 것이 거의 틀림없다.
한편 만주의 말갈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지닌 고구려의 경우를 보면 수서·당서의 기사를 약간 수정한 2, 3개 기사밖에 보이지 않는다.
고구려기에 고대 만주족인 말갈 관계기사가 거의 없다는 것이 있을 수 없는 일이나 더 기이한 것은 숙신 관계기사이다.
고구려기에 보이는 숙신 관계 2, 3기사는 허구라는 견해도 가질 수 없는 바 아니나 오소리강이나 그 일대의 원주민에 대한 칭호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밖에도 부여·동부여·계단·돌궐·선비에 대해서도 약간의 기사가 보이나 대체로 중국기록을 거의 그대로 옮김으로써 많은 의문을 내포하고 있다.

<언어자료로서 본 삼국사기>이기문|고대어 어원 밝힌 지리지|삼국은 친족관계이나 다른 언어 사용한 듯
『삼국사기』를 보면 우리는 그 속에서 고대 제어의 어휘의 편영을 엿볼 수 있게 하는 자료를 발견한다. 이 책에 표기된 고구려·백제·신라의 고유명사들이 그 주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고대의 고유명사·표기법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강조할 필요를 느낀다. 각 한자는 음과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혹은 그 음만을 취하여 표기하고 혹은 그 의미만을 취하여 표기하는 방법을 우리의 선조들은 발달시켰던 것이다.
이런 고대 표기법의 관점에서 볼 때 삼국사기(또는 삼국유사)의 고유명사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어떤 고유명사는 음독표기와 석독표기를 아울러 가지고 있지만 어떤 것은 그 중의 하나만을 가지고 있다.
사기와 유사의 찬자의 중요한 차이로서 우리는 유사의 찬자가 고대 표기법의 전통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음에 대하여 사기의 찬자는 그렇지 못했음을 지적할 수 있다.
사기의 찬자가 석독표기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흔적은 어디에도 드러나 있지 않다. 그는 음독표기의 경우에 그것이「방언」내지「토언」임을 인식하는데 그쳤던 것이다.
어떤 고대의 언어가 기록으로나 구전으로 겨우 고유명사에 그 흔적을 남기는 예는 결코 드문 일이 아니다. 이런 경우 언어학자는 고유명사의 어원론을 일삼게 되는데 여기에서 그는 여러 가지 난문제에 부닥치게 된다. 고유명사의 어원론은「위험한 장난」이 되는 것이다.
삼국사기에서 언어자료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리지(권34∼37)다. 우선 권 34∼36과 권 37의 기본성격의 차이를 지적할 필요가 있다. 권 34∼36은 신라·고구려·백제의 옛 이름과 경덕왕개명을 보여준다. 그 중 언어자료로서는 구명이 음독명으로 표기되고 개명이 구명의 충실한 한역인 경우가 가장 좋다.
이에 대하여 권37은 고구려와 백제의 지명자료 중에는 같은 지명의 음독표기와 석독표기가 실려있는 것이 적지 않다.
이것이 우리가 바랄 수 있는 최선의 자료이다.
삼국사기 지리지의 신라·고구려·백제의 지명을 엄격히 구별하여 분석해 보면 우리는 이들 삼국이 단일언어를 말했다고 보기 어려움을 발견한다. 이들 삼국은 친족관계에 있기는 했으나 서로 다른 언어를 말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종래의 고대어 연구의 가장 큰 결점은 오늘날 우리 나라에서 단일언어가 말해지고 있으므로 옛날에도 그랬으리라는 선입견에 지배되어 삼국의 자료를 뒤섞어 버린데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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