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내린 「진산 시대」|백9일간의 투병도 보람없이|유진산 신민당 총재가 마지막 가던 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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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모닥불로 밤 밝힌 상가>
진산의 운명은 3시8분 신동준 비서실장에 의해 발표됐다.
이 발표가 방송에 의해 전해지자 보도진과 당 간부들이 병원 21층으로 몰려들었다. 당 간부들 가운데는 외출했다가 귀가 도중 방송을 들은 김영삼 부총재가 3시40분쯤 1착으로 도착했고, 뒤이어 채문식 고흥문 김원만 이철승 김의택 이민우 정해영씨 순으로 병원에 도착했다. 상오에 병원에 다녀 나간 신도환 사무총장이 도착한 5시까지 거의 전 신민당 소속 국회의원들이 병원에 도착했다.
예측은 해 오던 일이지만 막상 유 총재의 별세에 가슴이 철렁하다는게 대부분 의원들의 얘기.
당 간부들 외에도 종친인 유태하 전 주일 대사 등 친지들도 뛰어 왔으며 손경산 조계종 총무원장 등 3명의 스님이 병실로 찾아와 독경했다.
하오 6시엔 아들과 비서들의 운구로 고인의 유해는「다 2391」호 「앰뷸런스」에 의해 상도동 자택으로 옮겨졌다.
그로부터 자택엔 유진오 전 신민 당수·김대중씨를 비롯, 각계 문상객이 줄을 이었고 소속 의원·당원들이 6백23평의 뜰 곳곳에 모닥불을 피우고 봄 날씨답지 않게 쌀쌀했던 첫 밤을 밝혔다.

<마지막 1주간 혼수 상태>
운구 직전 주치의인 김종설 병원장이 공식 발표한 진산의 사인은 『대장암과 전이』. 암의 전이 방지는 당초부터 불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에 한대 입원 후엔 대중 요법만 해 왔다고.
환자에게는 실제 병명은 알리지 않고 「신경 통증」과 「신경 염증」이라고만 했는데 『진산의 의지가 강하고 최후까지 정신력으로 병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보였다』고 했다. 『한대 입원 당시엔 유언이 가능했지만 그 얼마 후 어려운 상태가 되고 말았다』고 김 박사가 말했다.

<끝내 병명 모른 채 운명>
유진산 신민당 총재가 운명하기 전에 남긴 마지막 말은 『아프다』는 한 토막뿐이다.
유 총재의 마지막 1주일간은 의식을 잃은 혼수상태여서 유언을 남길 수가 없었다고 주치의 박경남 박사는 설명했다.
임종은 부인 김현신 여사·유자녀·그리고 신동준 비서실장 등이었고 사망은 박경남 박사가 확인했다.
신 총장과 채문식 대변인은 여느때 처럼 이날 아침에도 한양대병원으로 유 총재를 문병했다.
이마에 「링게르」 주사를 맞고 있던 유 총재는 희미한 소리로 신 총장에게 『아파, 아파……』라고 고통스런 마지막 말을 남겼는데 이때 이미 유 총재의 왼팔이 차가 왔고 혈압이 최저 1백40까지 올라 위독한 것을 느꼈다고 신 총장이 전했다.
『내가 죽거든 당의 동지들이 조용히 묻어 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진산면 내 고향의 선영에 묻어 달라』고 한 고인의 뜻에 따라 당 간부들은 사상 처음인 「신민당상」으로 장례를 치르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조카사위 뻘이 되는 성락현 공화당 부총무가 당 간부들과 가족들에게 『정부서 국민장을 준비하고 있으니 국민장으로 하자』고 제의, 설득했으며 문상 온 김종필 국무총리도 「프랑스」의 「퐁피두」대통령 예를 들면서 어떤 형식의 장례를 하든 그후 다시 격식을 갖춘 다른 추도식을 가질 수 있을 것임을 암시했다.
특히 성 부총무는 당 간부들이 국민장을 거부하자 한사람 한사람씩 만나 설득을 벌이고 유족들에게도 『유 총재를 국립묘지에 모셔야 추모하는 사람들이 묘소를 참배하기가 쉽지 않겠느냐』 면서 종용했다.
당 간부들은 『신민당 장으로 하더라도 내용상 국민장과 같은 것이며 고인을 위해서도 당장이 마땅하다』는 태도를 굽히지 않았는데 처음 가족 장을 희망했던 유족들은 국민장 쪽으로 생각이 기울어져 간다는 얘기도 있었지만 정무 회의에서 당 장으로 하기로 만장일치 결의한 것.
진산 장례를 국민장으로 하자는 정부·여당 측의 제의는 얼마 전부터 있었던 것이라는 뒷 얘기고.
장지에 대해선 당 간부들 중에서 수유리 유석 (조병옥) 묘소 부근이 어떠냐는 의견이 있었으나 고인의 뜻에 따라 고향 선영에 모시기로 낙착.

<유언 한 마디 못 담고>
당 간부들은 진산의 유언을 듣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그는 공인이고 특히 야당의 현역 당수였기 때문에 마지막 당무를 말하게 했어야 했다는 것.
한양대병원 재 입원 직후 절망적이란 진단을 내린 의료진은 당 간부와 가족에게 그가 마무리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한 유언을 들어 두라고 했다.
당 간부 사이에서도 꼭 재기할 수 없다는 통고를 않더라도 만일의 경우에 대비, 뒷일을 맡기는 얘기를 해 달라고 할 수 있쟎으냐고 했다.
그러나 가족이나 비서진의 어느 누구도 그런 일을 해 내지 못하고 다만 간간이 하는 그의 토막말을 신동준 비서실장이 기록하거나 녹음해 남겼다. 이 녹음은 장례 후 공개할 예정이다.
그가 마지막 당무 처리를 할 수 있었다면 당수 권한 대행을 지명하고 당이 나가야 할 방향에 대해 그 나름의 부탁도 했으리라고 보는 간부들이 많다.
그의 죽음을 놓고 신민당 간부들은 모두 한결같이 결과에 대한 평가를 떠나 야당의 거목이 갔다고 입을 모았다.
김의택 수석 부총재는 『유 총재가 끝내 자신의 병명을 모른채 세상을 떠났다』 면서 언젠가 병상에서 『내가 왜 이렇게 살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결국 흙 속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인데…라고 말하더라』고 회상하기도 했다.

<지략 뛰어난 정치인>
당 외에서도 어려운 때 그를 잃게 된 것은 아쉬운 일이라고 했다. 논평을 간추리면….
◇윤보선 전 대통령=일단 판 뚜껑을 덮게 되면 그 사람에 대한 공과가 가려져야겠지….
◇유진오 전 신민당 총재=그와 당을 같이하면서 지략이 뛰어난 점을 느꼈다. 야당을 이끌어 간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의 일관했던 야당 투쟁은 평가돼야 할 것이다.
◇박순천 전 당수=사람이 백년을 사는 것도 아닌데 고생하다 갔다. 정치엔 남모르는 어려움이 많고 그러기에 어디 칭찬만 듣는 사람이 있겠느냐.
◇김대중씨=애도와 명복의 뜻을 표한다. (그는 이 말을 비서에 전한 채 더 이상의 말을 피했다.)
◇이효상 공화당 의장 서리=그 동안 반공 투사로서, 야당의 지도자로서 그때그때 국가 이익을 충분히 감안하는 형안이 있는 지도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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