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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와 동고동락 … 돌연변이 뛰어나 미꾸라지처럼 백신 비켜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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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17일 전북 고창의 동림 저수지. 농림축산검역본부 김대균 질병관리과장은 호수 중앙에 죽은 채로 떠 있는 철새 5∼6마리를 목격했다. 김 과장은 죽은 철새를 수거해 검사하면 사인(死因)을 밝힐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지만 사체까지 접근하는 것이 문제였다. 마침 그곳이 김 과장 고향 인근이어서 수소문 끝에 2인승 고무보트를 빌릴 수 있었다. 오후 3시쯤 보트를 운전할 민간인 1명과 검역본부 문은경 연구관이 고무장갑·방역복으로 완전 무장한 채 보트에 올라탔다. 김 과장은 “난생처음 ‘고무보트 작전’을 해봤다”며 “현장에서 조류 인플루엔자(AI) 가검물을 취급하는 사람에게 바이러스는 생명을 위협하는 공포의 대상”이라고 전했다.

 꽁꽁 언 저수지 얼음을 깨가며 500m쯤 나아갔을 때 물속에서 큰기러기 1마리와 가창오리 25마리의 사체가 발견됐다. 죽은 철새들을 수거해 검역본부에서 정밀 검사한 결과 큰기러기는 독극물, 가창오리는 고병원성 조류 인플루엔자 H5N8에 의해 죽은 것으로 확인됐다. 정부는 이를 근거로 철새를 이번 AI의 주범으로 지목하고 있지만 아직 확실하지는 않다.

 AI뿐만이 아니다. 겨울철의 대표 식중독균인 노로바이러스는 이번 겨울 강원도 춘천을 찾은 대만·홍콩인의 여행을 망쳐놓았다. 지난달 27일부터 복통·설사·구토 등 장염 증세를 보인 28명의 가검물을 수거해 검사한 결과 이 중 16명에게서 노로바이러스가 검출됐다. 질병관리본부 역학조사과 이형민 연구관은 “노로바이러스에 오염된 식품이 닭갈비란 소문이 돌았지만 사실이 아니다”며 “식수에 바이러스가 오염된 것으로 보이며 문제의 G식당은 문을 닫은 상태”라고 전했다.

 층간 소음 때문에 이웃 주민과 심하게 말다툼을 벌인 강모(42·여·서울 서초구)씨는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은 탓인지 이달 초 얼굴 주변에 물집·염증이 생기고 통증이 느껴져 8일 인근 피부과를 찾았다. 대상포진 진단을 받은 강씨는 항(抗)바이러스제(바이러스 질환 치료제)를 맞았으나 “수포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시력도 나빠진 것 같다”며 불안해했다. 대상포진 바이러스와의 한판 싸움의 흔적이 얼굴에 남은 셈이다.

 농림축산검역본부 송재영 바이러스질병과장은 13년째 돼지 ‘에이즈’로 통하는 돼지 생식기 호흡기증후군 바이러스(PRRS)와 ‘사투’를 벌이는 중이다. PRRS의 예방백신을 개발 중인 송 과장은 “인플루엔자(독감) 바이러스에 버금갈 정도로 PRRS의 변이(變異) 능력이 뛰어나 연패를 거듭하고 있다”고 인정했다.

 바이러스는 태고적 인류의 탄생과 함께해왔다. 인간과 바이러스와의 한판 대결은 위험하고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18세기 말 영국의 의사 에드워드 제너는 병의 정확한 원인도 모르는 상태에서 종두법을 개발해 두창(천연두) 바이러스를 퇴치했다. 인류가 바이러스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당한 것은 1918년부터 시작된 ‘스페인 독감’(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서다. 조류 인플루엔자나 2009년 신종 플루 발생 때 전 세계가 공포에 떤 것도 스페인 독감의 악몽이 재현될까 우려해서다.

 바이러스는 각종 감염성 질환을 일으키는 병원체 가운데 가장 작은 존재다.

 연세대 생명공학과 성백린 교수는 “바이러스는 유전자 침입자”라고 규정한다. 바이러스의 유전자가 우리 유전자에 들어오면 생명현상을 통째로 바꾸어 놓을 수 있다는 것.

 바이러스는 세균(박테리아)보다 훨씬 작다. 세균이 ‘축구공’(길이 약 1㎛, 1㎛=0.001㎜ )이라면 바이러스는 ‘탁구공’(길이 0.1㎛)만 하다. ‘덩치’론 1000배 차이다. 비록 미생물이지만 엄연히 생물인 세균과 달리 바이러스는 생물도 무생물도 아니다. 사람·동물·식물의 세포 속에 있을 때는 세포 성분들을 이용해 마치 생물처럼 증식한다. 하지만 세포 밖으로 나오면 무생물로 존재한다.

 바이러스는 유전자와 증식에 필요한 단백질만 갖고 있다. 세균과 달리 자신의 모습을 수시로 변이(돌연변이)시키는 데 능한 것은 이처럼 구조가 단순해서다.

 바이러스 중엔 두창·소아마비·우역 등 지구상에서 사라졌거나 홍역·A형 간염·B형 간염 등 기세가 한풀 꺾인 것도 있다. 질병관리본부에 따르면 A형 간염은 2011년 5521건, 2012년 1197건, 2013년 876건(잠정)으로 줄었다.

 사람의 건강을 위협하는 바이러스들 중 가장 다루기 힘든 것이 인플루엔자(독감) 바이러스다. 스스로를 교묘하게 변이시켜 예방백신이나 치료약을 무력화하는 ‘미꾸라지’ 같은 바이러스여서다. 수은주가 떨어지면 자주 발생하는 바이러스 질환이 노로바이러스 식중독, 인플루엔자, 조류 인플루엔자, 대상포진이다. 한림대 강남성심병원 감염내과 이재갑 교수는 “겨울에 유행하는 바이러스 질환은 원인체인 바이러스들이 저온·건조한 환경에서 오래 살아남기 때문에 빈발한다”며 “감기를 일으키는 라이노·아데노바이러스는 온도에 민감하지 않아 감기가 연중 발생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바이러스가 일으키는 질환은 의외로 많다. 에이즈·사스(SARS)·광견병·에볼라·풍진·볼거리의 병원체가 바이러스다. 뎅기열·말라리아·일본 뇌염도 주범은 모기가 아니라 모기의 침에 든 바이러스다. 지난해 6월 발생한 ‘살인 진드기’의 진범도 작은소참진드기에 감염된 SFTS 바이러스였다.

 가톨릭대 의대 백순영 교수는 “백신(예방주사)을 맞는 것과 자신의 면역력을 높이는 것이 최선의 바이러스 대처법”이라고 강조했다. 두창 등 인간이 몇 차례 바이러스를 이긴 기록은 있지만 사람과 바이러스 싸움의 승패는 현재까지도 결정 나지 않았다.

박태균 식품의약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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