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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백성호의 현문우답

사랑을 이유로 기회를 뺏다니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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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백성호 기자 중앙일보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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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
문화스포츠부문 차장

#풍경1 : 미국 LA에 ‘노부’라는 일식당이 있습니다. 예약을 하려면 몇 달씩 기다려야 합니다. 할리우드의 내로라하는 스타들의 단골집이죠. 그 식당의 주인이 마쓰히사 노부유키입니다.

 제주도에서 그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도쿄의 스시집에서 일했습니다. 무슨 일을 했느냐고요? 3년간 설거지를 하고 접시를 닦았습니다. 식당 청소도 했습니다. 3년이 지나자 요리사가 새벽 시장에 데려갔습니다. 거기서 생선을 샀느냐고요? 생선은 요리사가 골랐고, 그는 생선을 담은 물동이만 날랐습니다. 그걸 또 3년간 했습니다. 노부는 “내가 직접 스시를 만드는 날이 과연 올까?”라고 수없이 자신에게 되물었다고 하더군요.

 #풍경2 : 라스베이거스 벨라지오 호텔 일식당의 총주방장은 한국계인 아키라 백입니다. 그곳 호텔가에서 동양인 최초이자 최연소 총주방장입니다. 그가 견습생일 때 처음 배운 일은 밥 짓기였습니다. 그를 가르친 셰프는 밥 짓기만 무려 7년을 배웠다고 합니다. 밥 냄새만 맡아도 불의 세기와 식초를 얼마나 넣었는지 알 정도였습니다. 그 밑에서 아키라 백은 혹독하게 밥 짓기를 익혔습니다. 무 깎기도 그랬습니다. 그는 “하루에 몇 상자씩 무를 깎다 보니 나중에는 칼만 쥐고 있어도 무가 깎였다”고 했습니다.

 언뜻 보면 ‘전형적인 도제식 교육’으로만 보입니다. ‘현문우답’은 궁금합니다. 거기에 어떤 노하우가 숨어 있길래 장인(匠人)이 배출되는 걸까요.

 ‘노부의 설거지’를 들여다 봅니다. 그는 설거지를 하며 접시만 닦진 않았습니다. 접시에 묻은 밥알의 느낌, 밥알의 찰기, 접시와 스시의 궁합 등을 아주 깊이 들여다봤을 겁니다. 왜 그게 가능했을까요. 자신이 ‘직접’ 설거지를 했기 때문입니다. 물과 접시, 접시에 묻은 밥알을 내 손으로 직접 만지고, 문지르고, 느끼며 터득했던 겁니다. 그걸 통해 스시에 대한 통찰력이 생긴 겁니다. 아키라 백도 마찬가지입니다. 무를 썰면서 숱한 시행착오를 거쳤을 겁니다. 칼을 잡는 방향, 누를 때의 힘, 써는 각도, 무의 재질을 끊임없이 느끼고 생각하며 칼이 손에 익었을 겁니다.

 #풍경3 : 학교를 다녀온 중학생 아이가 가방을 엄마 무릎에 확 팽개쳤습니다. 깜짝 놀란 엄마가 이유를 물었습니다. 아이는 “중요한 수업 준비물을 빠트렸다”며 마구 화를 냈습니다. 가방은 항상 엄마가 챙겨주니까요. 엄마는 아이를 꾸짖었습니다. 아이는 그런 엄마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며칠 전에 들은 실화입니다.

 그걸 듣고 ‘현문우답’은 노부와 아키라 백이 떠올랐습니다. 유치원 때부터 시작됐던 겁니다. 아이의 가방을 엄마가 챙겨주는 일 말입니다. 그게 중학생 때까지 이어진 거죠. 그걸 일식집 요리사에 대입하면 어떤 걸까요. 부모가 설거지도 대신 해주고, 시장에서 장도 대신 봐주는 겁니다. 무도 대신 깎아주고, 밥도 대신 지어줍니다. 그러면서 아이에게 말합니다. 뛰어난 요리사가 되라고. “가방을 정리하는 사소한 일은 엄마가 해줄 테니까, 너는 공부만 열심히 해.”

 어쩌면 이게 자식 교육에 대한 우리의 자화상 아닐까요. 삶은 하나의 거대한 초밥입니다. 아이는 가방을 직접 챙기고, 방을 직접 청소하고, 책꽂이를 직접 정리하면서 사물의 이치, 초밥의 이치를 터득합니다. 직접 가방을 챙기며 내일 수업 일정을 생각하고, 필통·책·노트를 이리저리 배치하며 공간감과 기획력을 키웁니다. 가끔 준비물을 빠트리는 시행착오는 보약 중의 보약입니다. 그걸 통해 삶에서 마주칠 더 큰 시행착오를 막게 되죠. 그런데도 우리는 “아이를 사랑하니까”라는 이유로 그 모든 기회를 원천봉쇄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그러면서 아이에게 요구합니다. 초밥왕이 되라고.

백성호 문화스포츠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