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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명문장 <4>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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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박석무 이사장은 어린 시절부터 할아버지 사랑방에서 황현의 절사(節死) 이야기를 들으며 그 꼿꼿한 선비정신을 넉넉하게 귀로 익혔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지식인 노릇하기 참으로 어렵다네. 내가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다만 나라에서 선비를 양성한 지 500년인데, 나라가 망하는 날에 한 사람도 나라를 위해 죽어가는 사람이 없다면 어찌 통탄스럽지 않으랴. 나는 위로 하늘에서 받은 떳떳한 양심을 저버리지 못하고 아래로 평소에 읽었던 책들의 내용을 저버리지 않으려고 눈을 감고 영영 잠들어 버리면 참으로 통쾌함을 느끼리라. 너희는 지나치게 슬퍼하지 말지어다. -매천 황현의 ‘유서(遺書)’ 중에서

매천(梅泉) 황현(黃玹·1855~1910)의 지기지우이자 한말 출중한 문장가이자 역사가였던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1850~1927)이 황현의 ‘본전(本傳)’에서 황현이 운명하기 직전에 자제(子弟)들에게 남긴 유서(遺書)라고 소개한 문장이다.

그렇다면 매천 황현은 누구인가. 한말 최고의 역사서라고 정평이 난 황현의 저서 『매천야록』의 맨 끝에 실린 기록으로 그가 누구인가를 정확하게 알아보자. 매천의 후배인 고용주(高墉柱)라는 분이 추후에 썼다고 전해지는 ‘소전(小傳)’이다.

 “황현은 자가 운경(雲卿)이요, 본관은 장수(長水)이고 무민공 황진(黃進)의 후손이요 호는 매천이다.(…) 고종황제 무자년(1888년)에 성균 생원이 되었다. 담론을 잘했고, 기특한 절조가 있었다. 세상이 돌아가는 형편이 어쩔 수 없게 되자 고향으로 돌아와 시와 글에 마음을 붙여 아름답고 뛰어난 시문을 지어냈다. 평소에 손에서 책을 놓은 적이 없었다. 융희 4년(1910년) 음력 8월 3일 합방령이 구례군청으로부터 일반인에게 반포되자, 바로 그날 밤에 아편을 먹고 이튿날 숨을 거두었다. 유시(遺詩) 네 수를 남겼다.”

 다시 황현의 유서로 돌아가자. 『매천야록』에는 유서 이야기는 없다. “대한제국이 망하자 앞전의 진사(進士) 황현이 약을 마시고 죽었다”라는 기록 다음에 “유시(遺詩) 네 수를 남겼다”고 했는데, 아마 황현은 죽음에 임하여 유서를 쓰기 전에 먼저 유시를 썼던 것으로 보인다.

 새와 짐승도 슬피 울고 바다와 산도 찡그리니
 무궁화 조선은 망하고 말았네.
 가을 등불에 책 덮고 옛날 역사 회고하니
 글자나 아는 사람 되기 어렵기만 하구려.

 여기서 ‘글자나 아는 사람’이란 ‘식자인(識字人)’인데, 당시로서는 선비이지만 지금으로는 지식인이다. 자신을 선비로 자처했던 황현, 그는 난세를 살아가는 선비의 어려운 입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중국의 역사를 모두 돌려보고, 조선의 역사를 찾아보면서, 국가의 어려움을 당해 목숨을 버리거나 지조를 굽히지 않았던 선비들을 언제나 그리워하고 사모했던 사람이었다. ‘효효병(<5610><5610>屛)’이라고 알려진 병풍은 10폭인데, 중국의 도잠(陶潛)·장한(張翰)·양진(梁震)·고염무(顧炎武) 등 10명의 의인들에게 바치는 시를 지어 만든 병풍이었다.

 조선의 의로운 선비들에 대해서도 황현은 한없이 존경하고 사모하면서 시를 짓고 글을 써서 그들을 찬양하였다. 을사늑약에 분노를 참지 못해 자결했던 민영환·조병세·홍만식 등 고관들에 대하여 ‘오애시(五哀詩)’를 지어 애도했는데 3인 이외에 먼저 세상을 떠난 자신의 지기지우였던 영재(寧齋) 이건창을 넣었다.

 또 살아있다면 반드시 나라에 몸을 바칠 것이라 여겼고, 살아있는 사람으로는 죽어야 한다고 권장하고, 또 그는 반드시 나라를 위해 순국하리라 믿었기에 면암(勉菴) 최익현을 합해 오애시를 지었다.

 난세에 떠밀려 머리 허연 나이 이르도록
 목숨 던지려다 그만둔 게 몇 번이던가.
 오늘에야 정말로 어쩔 수 없게 되었으니
 흔들거리는 촛불 하늘 깊은 곳 비추네. 

 죽지 않은 최익현을 권해 끝내는 의병을 일으켜 붙잡히게 했고, 그 뒤 대마도에 구류되어 물 한 모금 쌀 한 톨 왜국의 것은 먹지 않겠다고 단식하다 순국하게 했으니, 자신은 죽지 않으면서 남에게만 죽으라고 하는 선비는 세상에 없었다. 황현은 오래전부터 죽을 각오를 이미 가슴속에 담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최익현에게 바친 황현의 만시나 제문을 읽어보면 그는 지상의 사람이 아님을 넌지시 보여주고 있었다.

 나의 증조부 민재(敏齋) 박임상(朴琳相) 공은 바로 면암 선생의 제자였다. 우리 집 사랑에 할아버지 친구분들이 모이면 면암의 순국 이야기, 매천의 절사(節死) 이야기였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건재(健齋) 김천일, 제봉(霽峰) 고경명, 중봉(重峯) 조헌 등 그들의 위대한 충의와 순국의 기개를 존경하고 찬탄하던 말이 끊일 때가 없었다. 나는 소년 시절에 벌써 최익현과 황현의 일을 넉넉하게 귀로 익혔었다.

 대학생이 된 뒤 『매천집』과 『매천야록』을 읽을 때마다 황현의 죽음에 얽힌 이야기는 언제나 내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글자나 아는 사람’ 되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이고, 고관대작도 아니어서 국록을 받은 적도 없고, 나랏일에 관여할 처지도 아니지만, 죽을 수밖에 없다던 매천의 양심 앞에, 나는 방황하고 흔들거리면서 살아올 수밖에 없었다. 선비의 길이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선비가 되는 것인가를 언제나 곰곰이 생각했는데, 그때마다 내 영혼을 흔들어주던 문장은 바로 황현의 유서였다.

 1980년대 말 한길사에서 간행했던 『다산기행』의 초판본에는 ‘선비의 표상, 시심(詩心)과 의혼(義魂)’이라는 제목으로 ‘매천 황현론’이 실렸는데 유서를 그대로 번역해서 넣었다. 조선의 선비정신으로 가장 확실한 증거를 대라면 그 문장 말고 어디서 찾겠는가. ‘어떻게 그처럼 깨끗하고 올곧게 일생을 보낼 수 있으며 그렇게 선비다운 죽음을 택할 수 있었을까’라는 의문을 갖고 살아가는 나의 삶에 매천의 유서는 좋은 본보기를 보여주고 있다.

 나는 지사(志士)이고, 시인이고, 선비이던 황현이 의리에 목숨을 끊는 무서운 용기의 바탕을 앞의 글에서 언급한 적이 있다. “죽음의 행위를 창출한 인간됨의 깊은 뿌리가 없고서는 창조적 역사행위가 나오기 어렵다. 거세고 억센 목소리와 행동 뒤에는 잔잔하고 따뜻한 인간의 숨결이 자리하고 있어야 한다. 남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며, 남의 딱한 처지를 자신의 처지로 뒤바꾸어 함께 괴로워하는 심사가 뿌리하고 있는 인간만이 인간다운 행위를 성취해낸다. 매천의 의혼은 그런 데서 바탕이 마련되었으리라”라고.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

◆박석무=1942년 전남 무안 생. 전남대 법대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민주화운동에 투신해 네 차례 옥고를 치렀다. 한·중 고문연구소장, 한국고전번역원장, 한국학술진흥재단 이사장, 단국대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13·14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다산 정약용의 철학과 사상을 대중에 널리 알리는 작업을 해왔다. 『다산기행』 『다산 산문선』 『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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