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플레」속의 가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비교적 낙관적인 경제 예측을 하여 온 한국개발연구원(KDI)마저도 올해 물가의 예상 상승률을 38.3%로 보고 있다.
물가 상승이 완만한 때라면 어느 정도 정확한 예측도 가능하고 또 정책이 물가 등세를 어느 정도 제어할 수 있는 방법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물가가 요즘같이 뛰는 경우에는 정책도 다스릴 힘을 잃게 되고 만다.
요즘과 같은 상황 속에서는 다른 물가의 인상이 또 다른 물가의 상승을 유발하게 마련이다. 석유류 값이나 수입 원자재 값을 다시 더욱 올리지 않아도 이미 오르고 있는 물가의 운동만으로도 모든 물가를 계기적으로 더욱 상승케 하는 악순환 과정을 일으키게 하는데 충분한 것이다.
그런데도 여기에 다시 연탄값이 대폭 인상되었고 「벙커」C유·전기료·전화료 등이 다시금 들먹이고 있으므로 물가 상승은 더욱 지속될 수밖에 없는 국면을 보여줄 것이다.
물가가 이처럼 마구 뛸 때 가장 위협을 받는 것은 국민 생활이고 가계다.
물가 상승기에도 기업은 물가 상승으로 인한 비용의 증대를 생산물의 가격 인상으로 전가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인플레」이득마저 누리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가계는 그럴 수가 없다. 가계는 「인플레」의 일방적인 피해자인 것이다. 그 원인은 여러 가지라 하겠으나 무엇보다도 임금 상승률이 물가 상승률에 뒤지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경향은 요즘과 같이 물가 상승률이 격심할수록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는 법이다.
이것은 물론 가계의 실질 소득이 저하하는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결국 저축 여력은 줄어들 수밖에 없고 소비 지출을 삭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저축 여력이 없는 저소득자일수록 소비 지출의 삭감은 더욱 불가피한 것이 되고, 결국 가계비 가운데서 삭감하기 어려운 기초적 생존비인 음식비의 비중이 증대하는 경향을 보여줄 것이다. 실지로 우리의 경우 이것은 이미 하나의 강요된 현실로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인플레」는 여기에 더하여 그 밖의 길을 통해서도 가계 생활의 희생을 강요하는 작용을 하고 있다. 이를테면 「인플레」로 인한 공 금리의 실질적 인하가 가계 저축의 실질적 감가를 가져오고 있으며, 물가 상승으로 인한 임금의 명목적 상승과 가계 재산의 명목적 증대가 누진세율의 적용으로 세 부담의 실질적 증대를 가져오는 등 가계는 이중 삼중의 「인플레」피해를 입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가계가 「인플레」의 중압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고는 사실상 없다. 흔히 절약과 소비 생활 건전화를 강조하지만 그 여지는 매우 적다. 「인플레」로 인한 실질 소득의 감소는 그러한 여지를 사실상 거의 남겨 두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가계는 더욱 딱하게도 소비생활의 현명화를 통해「인플레」에 대한 대항을 꾀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가계는 「인플레」에 무력하고 무방비 상태에 있다. 이런 때 가계를 보호하는 책임은 마땅히 정책이 져야 하고 기업이 져야 하는 것이다. 물론 최선의 방법은 「인플레」의 근절에 있지만, 실질임금의 향상과 그 밖의 가계 부담의 경감을 가져올 차선의 방법이 정책과 기업에 의해서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