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망주석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망두석·망주석·망석은 모두 같은 뜻의 말이다. 화표라고도 한다. 분묘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석상. 왕릉을 보면 주위에 돌(석)로 사자·양·호랑이 등의 모습을 조각해서 세워 놓는다. 그리고 문무의 석상이 마치 무슨 명이라도 금방 받을 듯이 서 있다.
묘 주위에 이른바 호석을 두르고, 십이지상을 장식하는 분묘는 신라통일시대부터 볼 수 있다. 풍수설에 따라 먼저 지상을 보고 그 분묘가 이루어지면 석인·석수 등으로 신도를 장식했다. 묘의 주위엔 호석과 석난을 두르며 십이지상을 세운 것이다.
석인은 문인, 혹은 무인의 상을 볼 수 있으나, 문인비 중의 사상이 역연해서 지금도 산소의 묘들을 보면 주로 문인석상을 세우고 있다.
이것은 묘를 보호하는, 문자 그대로의 호석으로서 뜻이 있다. 그러나「영생불사」의 사상은 동서고금을 통해 종교의 세계가 아니라도 사람의 마음속에 잠재해 있었다. 따라서 고인의 정신세계를 상상하는 의식으로 그와 같은 풍습이 생겨난 것 같다.
「이집트」의「나르메르」왕의 묘, 「메소포타미아」의「우르」왕릉, 중국 하남성 안양의 무망 촌에서 발견된 은의 대묘 등은 순장의 풍속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적들이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순장제도는 있었다. 왕이나 귀족이 죽으면 그의 처와 종자들을 함께 매장해 버린다. 사후의 세계를 생시의 세계와 같게 재현시키자는 뜻이었다. 신하나 노비를 비롯해 그의 처까지도 산채로 묻거나, 혹은 죽여서 함께 파묻어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신라 지증왕 2년(AD502)에 이르러 그와 같은 순장풍습은 금지되었다. 말하자면 문인이나 무인, 혹은 짐승(특히 서수)들의 모습을 돌로 깎아서 세우게 한 것은 그런 순장풍속의 변형 유습인 것 갈다.
구미에선 묘소가 우리나라처럼 심산유곡에 동떨어져 있지 않다. 일본만 가도 주택가의 이웃에 바로 묘지가 있는 경우를 본다.
따라서 묘지는 공원으로 꾸며지며 수목들이 우거지고, 그 오솔길엔「벤치」도 놓여 있다. 한편으론 화원이 가꾸어져 현란한 꽃들이 아름답게 피어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풍속은 묘지를 먼 산에 모신다. 풍수설의 사상에서 유래한 것 같다. 묘소에 석상을 세워, 상상의 세계일 망정 적막하지 않게 꾸미려는 것은 그런 지리적인 소원감의 영향도 없지 않을 것이다.
바로 이 망주석을 빼다가 외국에 팔아먹는 세태는 너무도 야속하고 살벌함을 느끼게 한다. 수출, 아니「달러」가 비록 국책일지라도 우리의 전통·정신적 가치까지도 말살할 정도로 중요한 것일까.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