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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심 파기 기준의 법관인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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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대법원은 법관별 원심파기건수와 이유를 보고하도록 각급 법원에 지시하였다. 그 이유는 사실오인이나 법리해석의 잘못이나 채증법칙위배 등 재판결과의 실체보다 소송절차의 하자를 발견 못하여 상급심에서 파기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를 예방하기 위한 것이라 한다.
이러한 대법원의 조치가 과연 항소나 상고의 남소를 막을 수 있고 또 하급심재판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불가피한 것인지는 잘 알 수 없다. 만약에 하급심법관들의 판단 유탈이 늘어나 형식적 소송절차의 하자까지 모르고 본안에 관한 판단을 내림으로써 사건이 누적되고 있다면 이는 법관의 주의환기나 재교육으로써 족할 것이지, 원심파기건수나 파기이유까지 법관별로 조사 보고케 하는 것이 과연 필요할 것인지 의심스럽다. 이러한 조사는 하급심법관의 판단을 위축시킬 가능성이 없지 않다.
외국에서는 법관의 재판상의 독립을 보장하기 위하여 법관에 대한 진급제도자체를 부인하고 있는 경향이 있다. 미국서는 법관으로 선거되거나 임명되면 그것으로 족하지, 상급법원의 판사가 되려고 하거나 대법원판사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대륙법제도를 채택하고 있어 법관의 관료화까지 논의되고 있다. 판사의 위계제도가 있고 전보직제도가 있어 동료보다 빨리 승진하기 위하여, 또는 동경도에서 근무하기 위하여 최고 재판소판결만 복사하는 판사가 늘어 법관관료론이 대두되어 미국과 같은 종신임명제가 필요하다는 논의들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법관초임의 경우에는 성적순에 따라 배치되어 별문제가 없으나 전보의 경우에는 일정한 기준이 없어 법관들이 궁금해하고 있는데 앞으로 원심파기율이 인사고과의 대상이 된다면 대법원판결을 묵수하려고만 덤비는 무사안일주의 판사가 나오지나 않을까 두렵다. 법원의 판결이란 언제나 고정돼 있어서는 안되며 시대에 따라 변천, 발전하여야할텐데 파기율이 인사고과의 기준이 된다면 자연히 새로운 판결을 하지 않음으로써 사법판결의 정체와 현실유리를 가져올 것이다. 미국의 경우에도 처음의 소수의견이 나중에 다수의견으로 된 사례가 많았기 때문에 법률해역의 차이만을 가지고 이를 인사에 반영시킨다는 것은 승복할 수 없는 처사이다.
원래 인사고과제는 법관이나 교원과 같은 직위에는 적당하지 않은 것이다. 대개 인사고과는 직속상관이 하게 되는데 판결문이나 논문의 우열을 가려낸다는 것은 웬만한 전문가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요, 이를 한다고 하더라도 공정성을 기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따라서 대법원은 법관에 대한 인사고과가 법관의 재간에 영향을 끼치는 일이 없도록 신중하게 해야 할 것이다.
법관의 신분이 잘 보장되어야만 공정한 재판이 행해질 수 있으며 또 법관이 헌법과 법률과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재판할 수 있도록 보장해 주는 것이 대법원의 임무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작년의 재임명과정부터 상당히 위축되어 있는 것 같은 판사들의 사기를 더 저하시키는 인사고과제도는 신중히 재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이번 원심파기율에 대한 조사 만으로써도 법관의 판단유탈에 대한 경고는 충분히 되었기 때문에 대법원은 이번에 제출한 자료는 통계자료로나 삼고 더 이장 문제삼지 않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한다. 대법원의 재고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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