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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권석천의 시시각각

개인정보가 없는 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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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권석천
권석천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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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

잘 쓰지 않는 신용카드들이다. 하나는 후배의 판촉 부탁으로, 다른 하나는 패밀리 레스토랑 할인이 된다고 해서 만들었다. ‘개인정보 유출’ 뉴스에 카드사 홈페이지에 들어갔다. “ 머리 숙여 사과드립니다.” 짜증이 누그러진다. 금융사에서 사과를 받는 게 얼마 만인가.

 ‘개인별 조회’를 누르자 “개인정보·고유식별정보 수집 및 이용에 동의가 필요하다”는 메시지가 나온다. ‘동의하지 않음’을 클릭하자 “동의하지 않으면 조회할 수 없다”는 메시지창이 뜬다. 동의를 클릭한 다음 휴대전화 인증을 선택한다. 주민등록번호, 이름, 전화번호를 집어넣는 데 또다시 동의를 요구해온다.

 개인정보 이용 및 제공에 동의합니다.

 고유식별정보 처리에 동의합니다.

 통신사 이용약관에 동의합니다.

 동의하지 않으면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없다. ‘동의합니다’를 클릭하자 유출 목록이 튀어나온다. 성명, e메일, 휴대전화, 직장전화, 자택전화, 주민번호, 자택주소, 직장정보, 주거상황, 카드이용실적금액, 카드결제계좌….

 다른 카드사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카드번호, 유효기간, 결제정보까지 유출됐다. 안내문은 크게 상심할 필요는 없다고 위로한다. “창원지방검찰청은 불법 유출된 개인정보 원본파일을 압수했고 판매되거나 추가 유통되지 않았다고 발표….”

 그래, 내 변변치 않은 개인정보를 토대로 대한민국이 금융강국으로 도약하려다 생긴 일이라 양해할 수도 있다. 월 사용료가 300원이나 되는 카드결제 문자 서비스를 1년간 무료 제공해주고, 피해 발생 땐 전액 보상해준다고 하지 않는가. 카드사·은행 경영진도 사의를 표명하지 않았는가.

 그렇게 마음을 돌리려 해도 의문 몇 가지는 남는다. 카드 발급은 물론 유출 조회 때도 개인정보 이용 동의를 요구하는 이유는 뭘까. 동의 절차는 ‘합의는 위법을 구성하지 않는다’는 법 원칙에 따른 것이다. 본인이 동의한 이상 개인정보를 얼마든지 이용해도 된다는 얘기다. 과연 그것이 정당한 동의일까. 최승필 외국어대 로스쿨 교수는 이렇게 지적한다. “합의의 원칙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 때 적용되는 것이다. 카드 없인 일상생활을 할 수 없는 세상에선 동의가 아니라 강요일 뿐이다.”

 또 하나. 20여 개나 되는 개인정보가 카드 발급에 왜 필요한 것일까. 나와 당신의 개인정보가 금융 관련 협회와 신용정보사, 은행, 캐피털, 생명보험사 등 100여 곳에 뿌려져 마케팅과 금융기법 개발에 활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다 개인 생활이 낱낱이 분석되고 분류되는 건 아닌지 두려움이 앞선다.

 가장 큰 물음은 개인정보 유출 사건이 왜 끊임없이 이어지느냐다. 한 외국계 기업 임원은 “외국인 동료들이 ‘어게인(again)?’ 하고 황당해 한다”고 전해왔다. 금융당국이 개인정보 유출 사건이 터질 때마다 솜방망이 처벌에 그쳐온 까닭을 한 금융전문 변호사는 이렇게 설명한다. “금융당국이 문제를 방치해온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간 금융 산업의 경쟁력·효율성 강화를 위해 국민의 개인정보를 희생시켜온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어쩌면 우리 자신도 불감증에 빠져 있는지 모른다. 우린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주민등록번호를 부여받는다. 생년월일과 성별, 출생지역을 담은 주민번호는 개인정보의 알파요 오메가다. 그렇게 개인정보가 국가 주도로 관리되면서 기업에, 은행에 언제든 제공할 수 있는 ‘공공의 정보’가 돼왔다. 당사자들이 개인정보를 사은품과 맞바꾸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오늘 총리 주재로 관계 장관회의를 열고 재발 방지 대책을 발표한다고 한다. 며칠 만에 급조되는 대책에 얼마나 깊은 반성과 의지가 담길 수 있을까. 소비자로선 차라리 카드사에 해지 통화라도 됐으면 한다. “지금은 전 상담원이 통화 중이오니 잠시 후에 다시….” 더 이상 기계음에 지쳐가고 싶지 않다.

권석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