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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제2장 일본 속에 맺힌 한인들의 원한|제 9화 고균 김옥균의 유랑행적기(13)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일본에 분명히 남아있을 김옥균의 유족의 행방을 백방으로 수소문하고 있던 중 귀가 번쩍 뜨이는 소식을 들었다.
조선의 망명정치인 김씨의 손자를 알고있는 일본여인이 나타났다는 정보를 재일 한국인 작가 이회성씨가 전해준 것이다. 「도오꾜」의 위성도시라 할 「가와고에」시의 동양대학 직원숙사에서 일하는「이또」(이등광자·71세) 여사다.
아침나절이라 직원들이 모두 대학에 나가고 빈집처럼 조용한 직원숙사를 찾아간 기자를 맞아준 이등 여사의 얘기는 이렇다-.
이등씨 부부는 전전에 「도오꾜」 「고오또」에 있는「에드가와소오」라는 「아파트」에 살았는데 같은 「아파트」의 이웃에「이노우에」라는 분이 있어 이등씨와 친히 지냈다. 정상씨는 당시 『군상』이라는 동인지를 발행하고 있었으며, 나이는 26∼27세.

<송촌 부인 면회를 거절>
정상씨는 어느날 잡지동인으로서  「와세다」대학을 나왔다는 「마쓰무라」란 사람과 함께 놀러나와서 소개를 하는데 『송촌의 조부가 조선의 망명정치인 김옥균씨라고 하더라』 는 것이다.
송촌은 근우에도 자주 놀러오곤 했는데 여러 차례 만나다 보니 인품이 좋고 해서 유멍한 작가 「구라따」의 전 부인 「다까야마」여사에게 의뢰, 중매를 서게했다. 이들이 중매한 송촌의 부인은 「나까하마」.
그녀는 일찌기 「캐나다」에 표착, 현지에서 살다가 일본에 돌아와서는 「캐나다」견문기와 현지활동 등으로 해서 일약 명사가 되어 명치기의 고관까지 지낸 중빈만차랑의 손녀로서 유서 있는 집안의 규수.
이들 송촌씨 부부는 결혼 후에도 몇 차례 놀러왔으나 전후에는 서로 만난 일이 없는데 송촌의 어머니가 망명 정치인 김씨의 딸이라고 들었다는 것이다.
이등 여사가 「앨범」속에 간직해온 송촌부부의 결혼사진에 나타난 송촌은 얼굴윤곽과 눈매 코 모양에 이르기까지 김옥균의 젊은 시절을 방불케하낟. 이등여사가 아는 것은 여기까지-. 자세한 내용은 지금도 살아있을 정상씨(60세 정도)가 잘 알고 있을 것이며, 송촌씨는 재작년에 사망했다고 들었으나 부인(중빈징자)은 지금도 살아있다면서 친척집을 몇 군데 알려준다.
예상외의 수확에 뛸 듯이 기쁜 마음으로 「도오꾜」에 돌아오는 즉시 여러곳으로 수배한 끝에 중빈 여사의 집 전화번호를 입수했다.
그러나 막상 전화에 나온 중빈 여사는 아주 냉담한 태도로 『주인한테 아무런 얘기도 못 들었다』면서 한번만 만나달라고 부탁해도 바쁘다는 이유로 거절한다.

<조대서 영문학을 전공>
할 수 없이 방증취재부터 시작했다. 먼저 정상씨가 교편을 잡은 일도 있다기에 문부성·일교조, 그리고 한때 부임한 일이 있다는 「애히메」 현교육위 등으로 연락했으나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송촌정이가 조도전 출신이라는 점이 생각나기에 대학 학력과로 연락했더니 기록 「카드」가 보관돼 있다. 『1939년 3월 문학부문 학과 졸 영문학전공-.』
본적은 추전현 탕택시, 보호자는 『경성부 종로 2-32 식당경영 석정미송(숙부)』, 세대주는 본인이며 1934년 용산공립중학교를 나온 것으로 돼있다.
즉시 밤차를 타고 「유자와」로 떠났다.
「도오꾜」의 「우에노」를 밤 10시에 떠난 특급열차로 8시간, 탕택 역전 식당에서 서성거리다 날이 밝자마자 시청으로 달려가 호적부를 뒤지니 『송촌정이는 석천현 금택 출신이며, 19l8년 탕택의 송촌등길가에 양자로 들어왔다가 1963년 동경으로 이적』했다고 쓰여있다. 어머니도 양모로서 모두 사망.
실망하는 기자가 딱했던지 직원이「가나자와」로 시외전화를 걸어 그쪽 직원에게 조사를 부탁해준다. 1시간 후에 연락이 왔다. 입양 전 그쪽 직원에게 조사를 부탁해준다. 1시간 후에 연락이 왔다. 입양전 금택 쪽 호적에는 부모는 승목(정신·소노=사망)부부인데 생부모(7남)로서 분명한 일본인이며 조부모와 외조부모도 모두 일본인이라는 얘기다.
맥이 빠진 채 「도오꾜」로 돌아와서 중빈여사에게 전화를 걸어 그동안의 조사결과를 알리고 통사정을 했더니 이튿날 전화가 걸려와 「오까야마」에 사는 석정(일생)씨의 전화번호를 알려준다.

<김옥균의 묘비와 비슷>
시외전화를 받은 석정씨는 송촌의 보호자로 돼 있는 설정미송의 양자. 어렸을 때에 따르면 송촌은 『분명히 망명 정치인 김씨의 손자이나 김옥균이 아니고 김옥균의 동지인 김준룡의 외손녀』라는 것. 김준룡은 죽은 처 김씨 소생의 아들 하나를 서울에 남겨둔 채 딸 둘만을 데리고 일본에 망명했으며, 그 중 장녀 「도리꼬」가 일본인 「가도노」와 결혼, 송촌정이를 낳은 후 석정미송과 재혼했기 때문에 석정이 송촌의 보호자로 돼있으며 금택의 승목부부 역시 양부모라는 얘기다. 또한 김준룡의 묘는 지금까지 「미노부야마」의 구원사(일연종 총본산) 뒷산에 있다는 얘길 들었다고 전해준다.
신연산은 부사산을 가운데 두고 「도오꾜와 정 반대편에 있는 1천여 m의 산이며 중턱에 구원사는 전국에서 모여든 일연종 신자들이 흰 머리띠에다 「남무묘법 연화경」이라쓴 흿 덧 저고리를 입은 전투적(?) 차림으로 들끓고 있다. 사무국으로 찾아가 내의를 전했으나 묘를 아는 사람이 없고 오래된 묘지들이 본당 뒷산 여기저기에 남아있다고만 할 뿐이다.
본당 뒤로 돌아가니 지금은 관광객을 위해 산정까지「로프웨이」가 가설돼서 이용하는 사람이 드문 빽빽이 들어선 나무들에 가려 대낮인데도 어둑컴컴한 등산로가 산정을 향해 뻗어있다. 길 옆에는 곳곳에 쓰러져가는 묘비들이 산재해있다.
풀숲을 헤치고 묘비들을 일일이 점검하면서 산길을 헤멘지 2시간쯤 됐을까? 잡목 숲속에 주위의 다른 묘비들에 비해 유난히 크고 모양도 자연석 그대로의 낮선 비석이 보인다. 「도오꾜」진정사에 있는 김옥균 묘비와 흡사하다 느끼면서 가까이 가보니 주먹만한 글씨로 「조선지사 김자문 묘비명」이라 새겨져 있는 것이 아닌가! 오랜 풍상에 비문에 닳아 희미해지긴 했어도 한시간 남짓 이끼를 뜯어내면서 한자 한자 더듬어 갔더니 몇 자를 제외하고는 전문을 판독할 수 있었다. 『일동처사두산만전·동모포의수영원찬보서』로 된 꾀 장문의 비명이 있는데 이 비명과 수영문고소장 자료에 꼭 한줄, 『김준룡 군부주사, 명치 32년 망명일본』이라 기재된 것 등을 토대로 그 행적을 구성, 약기하면-.

<김준룡은 개화파 일원>
▲1864년 생 ▲임오군란 이전에 일본유학 ▲갑신정변 전에 군부주사 ▲동학난 아니면 단발령당시의 의병에 참가 ▲아관파천 때 친노파 제거공작 ▲독립협회 참여 ▲친노파 암살음모가 발각, 일본에 망명했으며 일녀 「하마다」와 재혼, 부인의 품팔이로 생계를 꾸려 가다가 을사보호조약 이듬해에 귀국, 광산을 해서 돈을 모아 서울서 살다 1938년에 죽었다. 그때 손자 송촌정이에게 유골은 신정산 구원사역에 묻도록 유언했다고 돼있다.
이로 미루어 김준룡은 개화파의 일원으로서 처음에는 반노지일파였으며 한국 합병 후에는 사업에 전신한 듯 한다.
그의 유언은 그가 일연종 신자였음을 말해주는데 당시의 친일파 중에는 일연종 신자가 많았었고 지금 한국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창가학회 또한 일연종의 분파인 점이 자꾸만 묘한 연상을 불러일으킨다.
김준룡의 자연비석 곁에는 사각기둥으로 다듬은 또 하나의 비가 서 있고 부 김명선, 김준룡, 처 풍자, 장녀 등이자 등 네 사람의 이름이 가지런히 새겨져 있다. 건립자는 차녀 복자.
구원사에서 돌아와 중빈 여사에게 전화를 걸어 다녀온 사실을 전했더니 『풀이 많이 자랐지요?』하고 묻는다. 여사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감추고 싶었던 심정대로 일본사회에 매몰되고 싶은 소망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친일파」라는 비난과 「조센지」이라는 멸시의 틈바구니에서 설 땅이 없었던 것이나 아닐까?
그러면서도 취재를 끝낸 지금 무엇인가 측은한 느낌이 드는 것은 무엇때문일까? 비명 끝부분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유책모시명부회만사휴분주도로 노고무주청산리골….』<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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