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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짝짜리 신발' 대박의 지혜 … 망해보니 보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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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7면

김대환 블랙마틴싯봉 대표가 17일 서울 대치동 본사 매장에서 블랙마틴싯봉이 내놓은 ‘세 짝 신발’을 소개하고 있다. [최승식 기자]

내수가 얼어붙었다는 요즘 400m가량 줄을 서서 쇼핑하는 잡화 브랜드가 있다. 지난 10~12일 서울 영등포동에 있는 ‘블랙마틴싯봉’ 타임스퀘어점에서 벌어진 진풍경이다. 핸드백을 50% 할인하는 이벤트를 열었는데 매장이 좁아 ‘10명씩 입장, 10분간 쇼핑’ 형태로 판매하다 보니 이 같은 장사진이 펼쳐진 것. 이 회사는 사흘간 전국 30개 매장에서 2만여 개의 핸드백을 팔았다. 금액으로는 28억원어치다.

 17일 서울 대치동 본사에서 만난 김대환(38) 대표는 “부끄럽기도 하고 조금 얼떨떨하기도 하다”고 말했다. 막 이탈리아 출장에서 돌아왔다는 그는 “기대 이상의 사랑을 받은 만큼 더 감각 있는 제품으로 보답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느낀다”고 덧붙였다.

 블랙마틴싯봉은 프랑스 디자이너 마르틴 싯봉(63)이 1985년 ‘마틴싯봉’이라는 이름으로 만든 패션 브랜드다. 골프의류 회사인 슈페리어가 지난해 2월 글로벌 판권을 사들이면서 한국 브랜드가 됐다. 김 대표는 “보다 세련된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블랙’을 앞에 추가했다”고 설명했다.

 2012년 5월 서울 압구정동 33㎡(약 10평) 매장에서 처음 선보인 블랙마틴싯봉은 ‘세 짝을 주는 신발’로 인기를 끌었다. 신발 한 켤레를 사면 오른쪽 신발을 하나 더 준다는 컨셉트다. 추가된 신발엔 색다른 자수를 넣어 일부러 ‘짝짝이’가 되도록 디자인했다. 평소에는 제 짝으로 신다가 기분 전환 등을 위해 다른 짝으로 바꿔 신을 수 있다. 그래서 신발 이름은 ‘론니 슈즈(lonely shoes·외로운 신발)’다. 연중 노세일로 판매하다 1월 11일과 11월 1일 전후를 ‘론니 데이’로 지정해 특별 할인을 한다. 지난 10~12일 매장이 북새통을 이룬 것도 이런 사연에서다.

 블랙마틴싯봉은 2012년 개장 첫 달 5000만원, 그해 7월 인터넷쇼핑몰 입점 첫 달 2억8000만원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지난해 매출은 320억여원이었다. 김 대표가 말하는 성공 요인은 첫째가 시장과의 소통, 둘째가 익살스러운 반전이다. “가장 먼저 신발은 10만원, 핸드백은 30만원 안팎이라는 가격을 정했어요. 젊은 여성들이 수용할 수 있는 수준이어야 한다고 판단했지요. 당시엔 몸에 달라붙는 스키니 바지, 끈이 없고 굽이 낮은 단화(loafer·로퍼)가 유행이었습니다. 여기에 재미를 더하자는 아이디어에서 세 짝 신발을 구상했지요. 시장 트렌드에 민감하되 고정관념은 뛰어넘자는 거지요.”

 불과 2년 만에 패션 기린아로 떠올랐지만 블랙마틴싯봉의 출발은 초라했다. 김 대표와 직원 1명이 신사업 조직의 전부였던 것. 매장 계약도, 기획 생산도, 디자인 컨셉트도 김 대표가 도맡았다. 67년 창업한 슈페리어 김귀열(72) 회장의 장남인 그는 “2010년의 트라우마(정신적 외상) 때문에 신사업은 사표를 써놓고 시작했다”고 털어놓았다. 그가 말한 트라우마는 미국 브랜드인 ‘페리엘리스’ 론칭 실패다. “당시 야심 차게 페리엘리스를 들여왔어요. 이때 가장 먼저 한 일이 직원 40명을 뽑은 겁니다. 장장 8개월간 준비해 대형 매장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반응은 냉정하더군요. 시장 트렌드를 살폈어야 했는데 준비만 잘하면 무조건 잘 팔릴 거라고 믿었지요. 자그마치 100억원 이상 손해를 보고 브랜드를 접는 순간 사표를 준비했으니까요. 그때 실패가 없었다면 저는 그냥 부잣집 아들에 머물렀을지도 모릅니다.”

글=이상재 기자
사진=최승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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