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1년까지 '설국'은 하나의 나라였다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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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雪國)에서 쿠니란 무엇인가?

왜 어떤 문장은 평생 가슴에 남아서 잊혀지지 않는 것일까.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雪國)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아주 어릴 때였다. 세계 명작의 배경을 찾아가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았던가. 밤 기차가 달려가다 새까만 터널 속으로 들어간다. 터널 저 끝에 있던 동그랗고 조그만 빛이 점점 커지며 눈앞으로 다가온다. 갑자기 하얀 눈빛에 눈이 확, 멀어 버리는 매혹의 순간. 숨이 멎는다. 그때 흐르는 나레이션.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雪國)이었다.” 좀 더 자라 알았다. 이 문장이 일본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의 첫 문장이라는 것을.

일러스트=홍주연

『설국』의 줄거리는 요약해서 소개하기가 어렵다. 무용 평론가 시마무라가 게이샤 고마코에게 끌려 눈이 많이 내리는 고장의 온천장을 세 번 찾아가는 이야기가 전부다. 여기에 마을 처녀 요코의 이야기도 곁들어진다. 1930년대 일본의 온천 마을 풍물과 눈 쌓인 겨울 풍경 묘사, 주인공의 허무와 아름다움에 대한 독백을 통해 일본의 전통미를 엿볼 수 있게 해 주는 수필 같은 소설이다.

1968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아서 그런지, 『설국』은 약간 내용이 수정되어 청소년판으로도 나와 있다. 그런데 대부분 제목이 『눈 고장』으로 바뀌어 있다. 성인용 완역본도 그 유명한 첫 문장에서 ‘설국’이 ‘눈 고장’으로 번역되어 있기도 하다. “현 접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 고장이었다.”라고. 원래 문장은 ‘국경’과 ‘설국’이다. 왜 요즘 책들은 ‘현 접경’과 ‘눈 고장’이라고 번역하는 것일까? 그런데 원문을 살린다고 하더라도, 한 나라 안에서 ‘국경’과 ‘국(國)’이란 표현은 좀 이상하기도 하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1935년, 니가타 현의 유자와 온천지역에 머무르며 소설 『설국』을 집필한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터널은 1931년에 완공된 시미즈 터널이다. 길이가 13km나 되는 이 터널은 일본 군마 현(群馬?)과 니가타 현(新潟?)의 경계가 되는 에치고 산맥을 통과한다. 그렇다면 소설 속에 나오는 ‘국경’은 우리나라로 치면 ‘도’에 해당하는 일본 행정 구역인 ‘현’의 경계이고, ‘설국’은 다설지(눈 많은 곳)로 유명한 니가타 현을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왜 작가는 굳이 ‘국경’과 ‘국’이라고 썼을까?

그것은 원래 일본의 현은 각각 독립된 하나의 나라였고, 현의 경계는 진짜로 수비병들이 무기를 들고 지키던 국경이었기 때문이다. 1868년 메이지 유신 이전의 일본은 명목상의 천황 아래 도쿠가와 가문의 쇼군과 지방 영주인 다이묘(大名)들이 대대로 자신의 영지를 다스리던 막번(幕藩)체제 국가였다. 각 영주가 독립적으로 다스리던 번(藩)은 하나의 쿠니(?), 즉 나라였다. 『설국』의 무대가 되는 니가타 현은 번을 폐지하고 새로운 행정구역인 현을 설치하는 1871년의 폐번치현(廢藩置縣) 조치 이전에는 에치고(越後)란 이름의 쿠니(?)였다. 지금은 에치고 산맥에 예전 이름이 남아 있다.

메이지 신정부는 대대로 지배하던 쿠니(?)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도록 무력을 과시하며 번주들을 설득했다. 이들의 협조를 이끌어 내기 위해 도지사격인 지번사에 그들을 임명해 번을 계속 지배하게 했다. 신분제도를 개혁하면서도 다이묘와 상층 귀족은 화족으로 정해 특권을 보장했다. 이들의 후예는 지금까지도 일본 정치계에서 활약하고 있다. 한 예로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 護?)는 제 79대 총리가 되기 전에 쿠슈 구마모토 현 지사였다. 구마모토 현은 옛날에는 히고(肥後)란 이름의 쿠니(?)로, 호소카와 가문이 지배했다. 호소카와 총리는 역사인식이 괜찮은 편이었지만, 현재 아베 신조 총리 등 대대로 가문의 정치적 특권을 계승한 일본 정치인들은 망언을 일삼는다. 사실 그들은 조상의 침략 역사를 부정하는 발언을 할 수 없다. 현재 자신의 존재와 자신의 정치 기반까지 부정하게 돼 정치 생명이 위태롭게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일본의 정치인들은 대대로 특권을 세습하고 있기에 일본 정치인들의 그릇된 언행은 일본 역사와 함께 봐야 한다.

?『백마탄 왕자들은 왜 그렇게 떠돌아다닐까』 저자, 역사에세이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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