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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적 차원에서의 국가간 협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다나까 일본수상의 의회발언 대하여 29일 우시로꾸 주한대사가 일본의 한국 통치를 정당화하려는 뜻은 아니었으며 그렇게 오해가 되었다면 본의가 아닌 것으로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는 해명을 전달하고 우리정부는 이를 양해하여 이 문제는 일단락 짓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로써 다나까 수상의 증언파문은 외교적인 레벨에서는 마무리 지어졌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한국 국민들의 가슴속에는 무엇인가 개운치 않은 것을 담겨둔 채 문제가「공식적」으로만 호도 되어버린 아쉬움이 남아있다.
우리도 한·일 두 나라의 진정한 우호와 친선을 바라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 일본의 양식 있는 인사들과 뜻을 같이하고 있다. 그리고 또한 일본의 관변 측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국가간의 친선을 위해서는 경제적인 것 이상으로 정신적인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통감하고 있다.
미국이나 유럽의 선진국들이 경제원조와 더불어 그 나라 문화의 실체를 소개하고, 학자·예술인·학생들의 교환을 위해 막대한 기금을 설치하고 있는 뜻도 이 때문이다. 일본은 소위 대동아 공영국이라는 가면 밑에 제국주의적 침략을 감행하던 때나, 한국 동란의 여덕으로 기적적 경제성장을 이룬 최근에 있어서나, 이같은 정신적 차원에서의 국가간 이해증진에 얼마나 인색한 나라였던가를 먼저 스스로 반성해야 할 것이다.
더우기 우리는 예나 지금이나 경제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을 따로 떼어 생각하고 행동하는 일본의 대외활동·해외진출에 대해서 처음부터 회의와 불안감을 가지고 보고 있다는 사실을 이 기회에 거듭 밝혀둘 필요가 있다.
정경분리라는 일본외교의 이원주의, -이른바 이커너믹·애니멀이라는 이름 밑에 인간적·도의적 책임감을 등한시한 채 순전히 경제이익만을 추구하는 애모럴(몰 도덕적)한 일본의 경제외교를 일본 사람들 스스로는 평화적인 것으로 여기고 있을지 모르나, 우리에게는 그 자체가 항상 큰 침략으로 느껴지고 있는 것이다.
모든 유형의 것이 반드시 정성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닌 것처럼, 모든 외교적인 제스처가 반드시 진정한 성의의 표현이라고 만은 보지 않는다. 그러나 그 반면 모든 정성은 반드시 어떤 형태로든 유형화되고, 진정한 성의는 반드시 어떠한 행태로건 표현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한국과 동남아에 대한 일본의 이른바 경제협력이 참된 국제친선의 성의를 담고 있는 것인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다만 우리가 분명히 알고 있는 것은 일본군국주의의 전쟁에 일본성명으로 강제징병 되어 갔다가 억울한 죽음을 당한 한국의 젊은이들이 실로 30년만에 그 이름들을 신문지상에 싣게 하고 있는 지금의 시점에 이르기까지, 일본은 아직 한번도 그들의 한국 식민지배에 대하여 사과다운 사과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서독과 폴란드와의 국교재개에 앞서 바르샤바의 유태인 게토 무덤 앞에서 무릎을 꿇은 그란트 수상의 외교적 제스처가 참된 것인지를 우리는 모른다. 오직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전후 일본의 어떤 수상도 왕년에 일제의 쓰라린 침략을 받은 나라를 찾아가 그와 같은 제스처를 한 일이 없었다는 사실뿐이다.
일본이 아시아 제국에 대하여 국민적 이해를 전제로 한마음과 마음의 접촉을 얻으려 한다면 그를 위해 반드시 하고 넘어가야 할 무엇인지가 이루어져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 없이는 경제적 협력이다 정신적 친선이다 하는 것은 모두다 빈말로서 허공에 메아리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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