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업 '스텔스 낙하산' 민간 출신 18명도 정권과 인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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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조원의 국부펀드를 운용하는 한국투자공사(KIC). 이곳에서는 지난해 10월 초부터 새누리당 대선캠프에 몸담았던 안홍철 전 국제금융센터 부소장이 차기 사장에 내정됐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KIC 안팎에서는 “뜬금없다”는 반응이 많았다. 당시 최종석 사장이 임기를 9개월이나 남겨둬서였다. 하지만 며칠 뒤 최 사장이 갑자기 사표를 낸 데 이어 한 달여 만에 안 전 소장이 신임 사장에 내정됐다. KIC의 한 직원은 “설마 했는데 경제부처 차관급 거물들을 제치고 오래 전에 관료생활을 접은 대선캠프 출신이 내정돼 직원들이 모두 깜짝 놀랐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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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공기관 ‘낙하산 파티’ 논란이 정치인·관료에서 민간영역으로 확산되고 있다(본지 1월 17일자 1, 6면). 박근혜 정부 들어 임명된 민간전문가 출신 공공기관 핵심 임원(기관장·감사) 중 18명이 지난 대선 과정에서 캠프·인수위원회 참여나 장외 지지선언을 통해 정권과 인연을 맺은 이들인 것으로 나타났다. 정치인 출신 핵심 임원(20명)과 맞먹는 숫자다. 본지가 17일 공공기관 경영정보 공개시스템 알리오를 통해 295개 공공기관의 임원 현황을 조사한 결과다.

 이들은 경제·복지·과학·예술을 비롯한 각 분야에서 오랫동안 종사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 때문에 전문성 자체는 의심받지 않는다. 최경수 한국거래소 이사장(캠프 자문)은 재경부 실장과 현대증권 사장을 거친 경제전문가이고, 최연혜 철도공사 사장(캠프 선대위원)은 철도공사 부사장을 지냈다. 문제는 이들 가운데 상당수의 선임 과정을 두고 공정성 시비가 끊이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정권창출 공신’이라는 프리미엄을 등에 업고 임원 공모 전부터 유력 후보로 떠오른 경우가 많은 것이다.

 한 공기업 임원은 “캠프 출신 인사가 유력 후보로 거론되는 순간 이미 다른 후보는 공정한 경쟁을 하기 어렵다”며 “공모 심사위원들이 분위기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실제 내정설이 흘러나온 경우는 KIC의 안홍철 사장 말고도 꽤 있다. 9월 취임한 이상무 농어촌공사 사장(중앙선대위 행복한농어촌추진단장)은 공모 단계에서 사장 내정을 전제로 한 취임계획서가 나돌아 곤욕을 치렀다. 지난 6월 정창수 인천국제공항공사 사장도 공모 전부터 내정설이 나온 뒤 최고경영자(CEO)가 됐지만 한참 동안 낙하산 인사라는 비판에 시달려야 했다.

 캠프 출신 중에는 공공기관 임원직을 정계 진출을 위한 중간 기착지로 삼으려는 게 아니냐는 비판을 받는 사람들도 있다. 최연혜 사장이 대표적이다.

 19대 총선에서 대전에 출마했던 최 사장은 16일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를 만나 “정치를 하고 싶으니 잘 돌봐달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 사장이 “총선 때 나를 도왔던 분들을 배려해달라고 도의적인 차원에서 부탁한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비판은 쉽게 가라앉지 않고 있다.

 경희대 권영준(경영학) 교수는 “캠프 출신 민간전문가가 공공기관장에 임명되는 관행이 반복된 탓에 실력 경쟁보다는 정치권 줄대기에 열 올리는 이들이 많아졌다”며 “캠프 참여 여부와 상관없이 객관적이고 투명한 과정을 통해 해당 분야의 최고 인재를 고를 수 있는 절차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세종=이태경 기자, 박유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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