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관용과 양보의 미덕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과욕은 과실이며 과신은 유한이야-. 올해로써 집 나이로 1백살의 삶을 맞은 김영식 옹 (서울 동대문구 신설동248의1). 구한말에 태어나 오늘에 이르기까지 망국의 슬픔과 광복의 기쁨을 몸소 겪은 노옹은 1세기의 삶을 통해 느낀 바를 이렇게 요약했다.
『요새 사람들은 지나치게 이기적이야. 관용과 양보의 미덕을 찾아보기 어렵거든. 욕심이 지나치면 나라까지 팔아먹는 법, 사리사욕을 버려야해.』짤막하게 깎은 은발을 털 고깔로 감춘 노옹은 처음부터 요즘 사람들의 이기주의를 나무란다.
김 옹은 1875년(고종12년) 1월27일생. 지금 경기도 용인군인 양지현에서 태어났다. 나라가 온통 다사다난하던 때. 대원군의 쇄국정치가 막을 내리고 열강에 의한 문호개방과 일본의 대한침략의 마수가 밀물과 같이 밀어들기 시작한 무렵이었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린시절을 그저 가난 속에 보냈고, 무엇이든지 배불리 먹어보고 싶었던 것밖에 기억나지 않는다 했다. 그러던 때에 용인 땅에 우연한 기연이 생겨났다. 갑신정변(1885년) 직후 송병준이 양지현감으로 부임하면서 담대하고 체격이 좋았던 김씨의 친형이 현영의 수문장으로 채용됐다.
그때 겨우 10세 안팎의 홍안소년이었던 김씨는 형을 따라 현영을 자주 드나들었고 현감의 사택에도 무상출입 하게됐다.
조그만 키에 겉으로는 얌전한 모습인 현감(송병준)은 철부지 소년을 남달리 귀여워해 주었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20여 년. 홍안소년은 장성하면서 형처럼 체력이 좋은 장사청년이 되었다. 30세 안팎의 어른이 된 김씨는 현감 직에서 물러난 뒤 오랫동안 소식이 끊겼던 송병준으로부터 어느 날 갑자기 서울로 곧 올라오라는 부름을 받았다.
그때 농사를 짓고있던 김씨는 어릴 적부터 귀여워 해주던 송의 부름에 가산을 정리하여 총총히 서울 길에 올랐다. 송병준이 윤시병·이용구 등과 함께 이른바 일진회를 조직한 바로 그 뒤였다. 김씨는 말하자면 송의 경호원 겸 일진회의 경비원으로 송의 부름을 받은 것이다. 당시 일진회의 본부는 독립관(현 서대문구치소 부근)에 있었다. 『처음엔「왕실의 존중」「국민의 생명과 재산보호」「외세의 배제」 등 창립당시의 목적은 그럴싸했지. 전국 회원의 모임이 있을 때마다 독립문꼭대기에 태극기를 내걸고 애국애족단체인양 위세가 대단했어.』-
그러나 그것도 잠깐, 그들의 흉계는 곧 일제의 앞잡이임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끝내는 고종황제까지 몰아내고 한일합방의 뜻을 이루자 태극기 마저 내리고 팽개쳤어. 그 길로 나는 독립관을 뛰쳐나왔지.』 당시의 울분이 새삼 솟구치는 듯 주름진 노안에는 금방 노기마저 서린다. 1평 남짓한 좁은 구석방, 머리맡에 반쯤 비워둔 1되 짜리 소주병에서 연거푸 3잔을 따라들며 말을 잇는다. 한 세기를 살아온 노병치고는 아직도 정정하다.
『일진회사람들이야 제가 1백년이고 2백년이고 오래 득세할 줄 알았지. 그러나 만백성의 원성을 힘으로 억누르고 얻는 영화는 결코 오래가지 못했지. 우리가 잃었던 이 나라는 36년만에 되찾을 수 있었지만 그들이 남긴 「매국노의 후예」는 자손만대에 영원히 지울 수 없어.』망국의 순간을 스스로 목격한 김 옹은 그때부터 맺히기 시작한 한을 풀기 위해 한 두 잔씩 들던 술이 됫술(지금은 3일에 소주 1되)로 눌었고 이젠 끊을 수 없는 여생의 유일한 반려자가 됐단다. 당시 일진회의 권세에 편승, 놀아났더라면 땅마지기나 여유가 생겼을 테지만 뒤늦게나마 송병준과 손을 뗀 것이 천행으로 느껴진다고 했다. 김씨는 그 뒤 경성중학의 정문수위로도 근무하다 서대문구 불광동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왔다는 것. 그리던 조국광복을 맞았고 지금은 아들(김수길씨·60·하숙업) 부부·손자들과 함께 신설동 고옥에서 살며 여생을 술로 벗삼는단다.
『지난여름까지만 해도 상오4시에 일어나 동네 골목청소를 도맡아 하시더니 요즘은 날씨 탓인지 바깥출입을 끊으셨다』고 노옹의 건강을 염려하는 아들 김씨는 『그러나 요즘도 세끼 밥에 반수만은 예나 지금이나 거르시는 일이 없다』며 다소 마음을 놓는다.
김 옹이 평소 즐기는 음식은 보리밥(전에는 콩밥) 과 매운탕찌개. 근력이 다소 쇠퇴했을 뿐 손수 면도질까지 할만큼 정정하고 깔끔한 노옹의 강수비결은 평소 즐겨드는 잡곡밥과 반주에 지난 허물을 회개하는 경건한 마음가짐 때문일까. <오만보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