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6)<제자 정구영>|<제34화>조선변호사회(11)-변호사 정구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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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조선인만의 「조선변호사협회」를 해체하고 일본인을 포함한 조선변호사협회를 새로 조직하자는 일본인 변호사들의 제의는 거부했지만 우리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사안을 조사할 필요가 있는 때에는 경성 조선인변호사회와 일본인 변호사회의 공동주최로 조사처리 할 것을 주장했다. 그 구체적인 예로 1929년께 평북정주경찰서장이 직권을 남용하여 평양의 일본인 변호사 삼강(기억이 정확치는 않으나 이것으로 생각된다)을 서장에 대한 예의를 잃었다는 맹랑한 이유로 유치장에 구속한 사건이 있었을 때였다. 일본인 변호사들이 격분하여 그 사건에 관하여 공동조사를 할 것을 제의해와서 경성 조선인 변호사회는 이에 동의하고 나 자신 회로부터 지명을 받고 일본인 변호사회에서 지명한 교본변호사와 같이 그 사건을 조사했었다.
조사결과 정주경찰서장의 행동 등은 직권남용에 의한 불법감금이라는 결론을 얻어 평북지사와 조선총독에게 항의하여 그 서장을 처단토록 한 것이 현재 기억되는 사건이다.
그후에 몇 가지 공동 조사한 사건이 있었으나 이렇다 할 기억이 없고 또 자연히 조선 안에 있는 전체 변호사의 의미를 갖지 못하는 관계로 인하여 공동조사는 비교적 권위가 서지를 못했었다.
그러나 그 권위가 비교적으로 적었다 하더라도 우리들의 고집으로 「조선변호사협회」는 해방당시까지 끝끝내 해체하지 않고 유지해왔던 것이다.
이제까지 변호사제도의 유래 및 초기의 인물에 관하여 몇 가지 말한바 있으나 판·검사의 관계에 대해서는 별로 말한바 없으며 또 그 판·검사는 변호사와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는 만큼 여담 겸하여 이에 대해서도 몇 가지 이야기를 나누겠다.
1919년 8월내가 경성지방법원에 처음 나가보니 경성지방법원의 판사가 16명이었는데 그 중에 조선인 판사로는 김태영·채용묵 두 사람뿐이었고 지방법원 검사국에는 조선인 검사는 단 한사람도 없었다.
경성복심법원 역시 모두 13명의 판사가 있었으나 문택규(전 상업은행장·문종건의 부친) 이선종 두 판사가 있을 따름이었다.
김태영·채용묵 두 판사는 신식법률을 학습하고 1년6개월 동안 법원서기로 근무하면서 판사로서의 직무수행에 필요한 여러가지 사항을 습득하여 일본의 제대출신이나 고등시험합격자 출신의 판사에 비하여 깊은 법리라든가 법철학에 관한 견식은 다소 불완전하였었을 것이나 소송을 진행하고 판결을 쓰는데 있어서는 큰 손색이 없는 판사였던 것으로 보였다.
또 복심법원의 두 판사 중 문 판사는 법관양성소 말기의 출신이며, 이 판사는 한성일어학교출신으로 대한제국법부에 취직하였다가 판사가 된 사람으로서 두 사람 모두 말하자면 법률에 관하여서는 많은 부족이 있었겠지만 수년간 일본인 판사들 사이에 끼여서 배석 판사로 일을 하는 가운데 습득한 판결방식과 법리를 이용하여 자기의 맡은 바의 사건처리는 그대로 해 나갈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기초지식은 불충분하였지만 구식 한문교육을 오랫동안 받았던 영향과 천부의 재질들이 능히 그 어려운 일들을 치러 나갈 수 있는 사람들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당시 조선 건국에는 조선인 판사가 30명 안팎이었고 검사도 6명이었는데 그들의 판·검사로서의 수준은 대개 경성지방법원의 김·채 두 판사의 복심법원의 문·이 두 판사의「레벨」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구 대한제국 당시 실시한 제2회 변호사 시험에 단 혼자 합격하였던 고 정구창 변호사에 관하여 이야기하겠다.
내가 여기서 정구창 변호사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그가 나의 종형이어서 약간 겸연쩍은 바가 있으나 그 시대의 시대상을 일반에게 알리는데 있어서는 필요할 것 같아서 한 마디 하려는 것이다.
정구창 변호사(현재 성균관대학교수이며 변호사인 정근영의 부친)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11살때에 이미 삼국지를 거의 암기하다시피 하였고 14살때까지 사서삼경을 통순하여 당시 한양의 대재로 소문이 났었다. 또 당시의 명필정학교 (당시광화문현판을 쓴 필가) 와 권동진 두 사람에게 사사하여 16, 17살때에 이미 명필이라는 칭예를 얻었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14살때 관립 영어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한 관계로 영어실력도 있었고 또 15살때 새로 생긴 흥화학교(매일 3, 4시간씩 중학과정을 교수한 간이중학교)에 입학함과 동시에 오후에는 YMCA학관 영어부에서 영어수업을 받았을 뿐 아니라 밤에는 보성전문학교(당시는 현재의 수송동에 있었다) 야학에 통학하여 일신삼역의 학업을 수년간 계속하는 것을 내가 직접 보았었다.
그는 12살때 결혼하여서 학교에 다닐때에는 으례 검정갓(흑립)을 쓰고 가죽신을 신고 다녔는데 그때 만해도 정부에서 공포한 단발령이 있었지만 일반에게 여행되지는 못했던 때이나 각급 학교에서는 단발영이 팽배하였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다니던 보전야학에서 학우들이 폭력으로 그의 상투를 베고 단발을 강행하였으니 당시 내부 참사관으로 있었던 부친(고 정일용)의 엄교가 무서워 삭발한 채로 귀가하지 못하고 계동에 있던 그의 처가에 3일 동안 피신했었다. 나중에는 자수하여 그 벌로 엄친으로부터 볼기를 맞고 부자가 서로 붙들고 통곡을 하였던 것을 역력히 기억하고 있다. <계속> 【정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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