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40)제9화 고균 김옥균의 유랑 행적기(2)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제2장 일본 속에 맺힌 한인들의 원한>
태어나자마자 김옥균이 지어준 이름을 지금까지 자랑스레 간직하고 있는 일본인이 있다.
대한제국의 망명정치인 김옥균이 일본 체재 중에 보여준 놀라운 글씨 솜씨는 당시의 일본인들의『경이의 적』이었다. 망명중의 김옥균과 같은 30대로서 친교가 두터웠던「이누가이·다께시」(견양의=1931년에 수상, 다음해에 암살된 정치인)는 그 회상록에서『김옥균은 서가 능했고 특히 세해는 놀라왔다. 서가 이렇듯 능한 이유를 물었더니 조선에서는 국왕이 죽으면 그 위패에다 일대기를 작은 붓글씨로 써넣게 마련인데, 한자라도 틀리면 사죄에 해당하므로 명을 받은 자는 세심하게 글씨를 익히게 마련이고, 나도 한번 그러한 명을 받아 몇 주일 동안 두문불출로 세자를 쓴 일이 있다』고 하더란다.

<견양의도 생전에 격찬>
김은 이렇게 해서 다듬은 해서 필치의 여력으로 행초서에도 능했으며 전각의 재주까지 겸해 자기 도장은 스스로가 조각해서 썼다. 본인방가의 도장도 김이 새겨 준 일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 「본인방」은 일본바둑의 종가로서 세습제(지금은 본인방명인전에서 선발)인데, 김옥균은 후일 본인방 21세가 된 명인전촌수재와 특히 친교가 두터웠다. 「다무라」(전촌=당시 5단)는 김옥균이 1886년「오가자와라」도로 사실상 유배될 때, 유혁회·정난교 등과 함께 이 섬에까지 따라갈 정도였다. 이밖에 김옥균은 19세 본인방 수영으로부터 바둑을 배워 실력은 1단이었다고 전해진다.
김옥균은 또 한시에도 능했기 때문에 체일 중에 사귄 많은 일본인들로부터 부탁을 받아 써 준「서」와「한시」등이 남아 있다.
김옥균이 한 일본인의 이름을 지어주게 된 것도 그에 대한 이러한 일본 안에서의 평가 때문이었던 것 같다.
1893년9월27일 김옥균은 동경「우시고메」에 있는 사교장「야라이」(실내)구락부에서 당구를 치고 있었다. 이때 함께 당구를 치던 일본인「우찌다」에게 집에서 심부름하는 아이가 달려와 부인이 사내아이를 방금 순산했다고 전했다.

<이름 지어 받은 이 생존>
이 소식을 들은「우찌다」는 당구를 치다 말고 김옥균에게 방금 출생한 아이의 이름을 지어 줄 것을 부탁했다.
김옥균은 즉석에서 붓을 들어 종이에 써 내려갔다. 시경왈 종종왕다길사 당길 표덕왕사』이렇게 해서 김옥균으로부터 이름을 지어 받은 어린애가 당년 80세의「가네꼬·아이기찌」씨.
지금 동경도내「세다가야」구의「교오도」라는 곳에 살고 있다. 그는 자라서 김자가에 양자로 갔기 때문에 성은「김자」로 바뀌었으나 이름만은 김옥균이 지어준「추길」을 그대로 쓰고 있다.
집으로 찾아간 기자를 맞아준「가네꼬」씨는 백발이 성성하고 얼굴모습이 말쑥한 선비같은 풍채. 기동이 힘들기는 하나 아직도 안경을 끼고서 책을 열심히 본다는데 얘기 도중에 가끔가다「펜」을 들어 쓰는 한문솜씨가 놀랍다. 김자씨에 따르면 부친인 내전삼성은 김옥균과 퍽 친하게 어울려 다녔으며, 견양의가 주최하는 강연회를 후원하기도 하는 등 활발한 재야 정치활동을 해왔다.
내전은 또 명치기의 정치인으로서 현 조도전대학의 전신인 동경전문학교를 창설한「오오꾸마·시게노부」로부터 학생 때부터 귀염을 받았고 내전의 부친(김자씨의 조부에 해당)은 화란인「시볼트」에게서 난학(덕천막부말기 구미선진문명을 화란어를 통해 받아 들인데서 생긴 구미문명의 통칭)을 배운 의사인 점으로 미루어 선각자의 집안이었던 것 같다.

<처형 사진 소중히 보관>
내전은 김옥균에게 처음에 아이의 작명을 부탁할 때「조선식 이름」을 지어 달라고 했으나 막상 지어준「무길」이라는 이름이 일본식 이름 같다고 했더니 김옥균은 다시 붓을 들어 자를「문사」라고 지어 주었다는 얘기다.
김자씨는 이「문사」라는 자를 중학때까지 써 왔으나 대정기에「엉터리 문필가」를 비꼬아 말하는「삼문문사」라는 말이 유행하면서부터 안 쓰기로 했다는 것이다.
김자씨는『김옥균이 상해에서 피살됐다는 소식을 듣자 부친(내전)은 가지 말라고 만류하는걸 뿌리치고 가더니 기어이 변을 당했구나 하면서 몇 번이고 아쉬워하더라』고 회상했다. 그는 또 자기도 어릴 때 몇 차례 부친을 따라「도오꼬」「아오야마」외인기지에 있는 김옥균의 묘에 참배를 갔었다고 밝혔다.
기자를 맞은 김자씨의 거실 중방에는『청청위천하정 김옥균』이라 쓴 휘호 액자가 걸려 있다. 깨끗한 것, 즉 청렴 결백하고 부패하지 않는 것이 천하를 바르게 한다는 뜻일까? 김옥균이 평소에 품어온 정도를 토로한 것으로 여겨진다.
「내전」이라고 분명히 쓰여진 이 자폭은 내전삼성이 김옥균에게 굳이 부탁해서 써 받은 것인데『붓을 놓은 김옥균이 잘 안됐다고 했고 부친도 확실히 평상시보다는 잘못 쓰여진 것이라면서도 소중히 여겨왔다』는 김자씨의 얘기다.
김자씨가 꺼내 와서 소중히 열어 보이는 오동나무로 된 상자 속에는 김옥균이 작명할 때 붓으로 쓴 종이가 지금까지 보관돼 있고, 김옥균이 피살된 후 유해가 서울로 옮겨져 당시의 정부에 의해 재차 능지처참된 양화건의 처형장 사진도 있다. 『대역 부도 죄인 옥균』이라 쓴 팻말이 보이는 이 사진은 그때 마침 서울에 갔던 내전삼성의 친구가 내전에게 보내 준 것이며, 『암전주작(주=김옥균의 일본명)회수…』운운하여 처형사실과 그 사진을 보낸다는 내용의 내전선생 앞으로 온 편지도 남아 있다.

<고균 사후 회상집 발간>
또한「김옥균」이란 책도 한권 나왔는데 표지에「증외헌 선생」이라 돼있다. 「외헌」은 내전이생의 호. 이붕은 김옥균 사후 22년 만인 1916년에 친우들이 발행한 회상문집으로 망명당시의 김옥균에 관한 귀중한 자료다.
이 책의 원본은 기자가 김옥균을 취재하면서 수영문우, 부전정문씨(경응대학교수·복택론길 연구가), 그리고 이 김자씨 소장의 세권을 봤고「도오꾜」의 한국연구원(원장·최서면)씨에도 사본이 있다.
그런데 김옥균이 내전삼성과 함께 출입한 사교장「실내구락부」는 당시로 치면 상당히 개화된 사람들이 모이던 곳으로 당구대 이외에도 바둑판과 응접실등이 있어 이곳에서 서구문명에 눈뜬 일본의 재야정치인들은 시국을 논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입수된 각종자료에는 김옥균이 화투놀이를 비롯, 각종 유기를 즐긴 사실이 나와 있으나 당구를 쳤다는 사실은 김자씨의 얘기를 통해 처음 밝혀진 것이다. 당구가 일본에 처음 들어온 것은 1850년대, 그러니까 김옥균이 당구를 친 것은 도입된 지 30년쯤 됐을 때라고 볼 수 있다. <계속>

<차례>
제2장 일본 속에 맺힌 한인들의 원한 제5화 북해도 한인위령탑의「엘레지」 제6화 가등청정의 볼모 일요상인 서답 제7화 신율도의 성녀「오다·줄리아」 제8화 포로학자 정희두의 애수 제9화 고균 김옥균의 유랑행 녹기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