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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정책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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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팔레스타인」의 불씨는「시온」의 언덕에 돌아가 나라를 세우려는「시오니즘」운동이 일어난 19세기 말부터였다.
1894년「드레퓌스」사건에 자극을 받아「시오니즘」운동을 일으킨「헬춤」은「오스트리아」의 신문기자였다. 그는 4천년 전에 유태인들이 추방된 다음부터「팔레스타인」은 무인의 황야인줄로 착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은 이 황야에 수많은「아랍」인들이 살고 있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각국에 산재해 있던 유태인들은「아랍」인들로부터「팔레스타인」의 땅을 매수해 나갔다.
때마침 1차대전이 일어났다. 당시「팔레스타인」은「터키」의 지배하에 있었으며 그「터키」는 독일 편에 서서 영국과 싸우고 있었다.
이리하여 영국은 고고학자「로렌스」로 하여금「아랍」의 태수「후세인」을 설득시켜「아랍」반란군을 조직하도록 만들었다.
『「팔레스타인」의「다마스커스」만 떨어뜨리면 해방된 땅의 독립을 인정한다』-이것이 1915년 영국이 후세인에게 보낸「맥마흔·후세인」서한이었다.
그러나 1차대전이 장기화되자 유태인 재벌들의 재정적 원조가 절대 필요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1917년에는『만약 영국이 이기면「팔레스타인」땅에 유태인 국가를 세워 주겠다』는 밀약을 맺었다. 이것이「발포어」선언이다.「팔레스타인」을 둘러싼 불씨는 이때부터 생겨났다고 할 수 있다. 「로렌스」는「발포어」의 길을 가리켜 영국의 척화이라 규탄하고 끝까지「아랍」의 편에서 싸웠다. 그가 이「아라비아」의「로렌스」가 된 것은 이 때부터였다.
그러나「히틀러」의 유태인 박해가 가중되어 감에 따라 유태인들은 뒤를 이어「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해 갔다. 1914년에「팔레스타인」에서 살고 있던 유태인은 8만5천명 정도였던 것이 43년에는 53만명으로 늘어났다.
당연히「아랍」선주민과 유태인 주민들 사이에선 쉴새 없는 격돌이 일어났다. 더우기 2차 대전 중에「아랍」민족은「나치」편에 섰고, 유대인은 연합군 편에 서서 싸웠다. 이게 두 민족의 증오를 더욱 격화시켰다.
새로운 불씨는「팔레스타인」분할안이 일으켰다. 2차대전의 종막과 함께「유엔」은 성지「예루살렘」을 국제 도시화하고 나머지「팔레스타인」을 둘로 갈라 주기로 했던 것이다.
여기에 격노한「아랍」측은 48년「이스라엘」공화국의 독립과 함께「팔레스타인」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 참패하자 1백만의「아랍」난민이「팔레스타인」에서 쫓겨나고 그 뒤를「이스라엘」측이 차지했다.
「아랍」측이「팔레스타인」의 회복을 위한 싸움을 성전이라 여기는 것도 당연한 일이나. 여기에 맞선「이스라엘」쪽으로서도 어찌 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런 두 민족의 싸움의 틈바구니 속에 우리나라도 이제 어쩔 수 없이 끼게 된 것이다. 다만 그것이 어떤 대의나 명분보다는 석유라는「실리」를 위해서라는데 뭔가 꺼림칙한 맛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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