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2)제33화 종로YMCA의 항일운동(22)|<제자 전택부>전택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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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일본순사 살해>
Y회관 3층에서 일본 헌병들의 공포소리에 놀라 뛰어 달아나는 소를 잡으려다 넘어져 비명을 외치는 시골나무 장수의 광경은 목도한 청년 민충식도 비장한 눈물을 흘렸었다. 그런데 하루는 그가 한강에 가서「스케이트」를 타고 저녁때 돌아오고 있었다. 그는 묘동 뒷골목을 끼고 돌아 종묘담 옆을 걷고 있노라니까, 어떤 칼찬 일본순경 하나가 지나가는 처녀를 붙들고 희롱하고 있었다. 그때는 이미 황혼이 깃들여 사람얼굴이 잘 안보일텐데 이것을 본 민충식은 자기 누이동생이 당하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면서 그러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그 순경은『키샤마와나니까』즉『넌 뭔데』하면서 칼을 빼어들었다. 그러자 민은 날쌔게 피하면서 메고 있던「스케이트」로 한대 갈겼다. 그자는 당장 거꾸러지고 말았다. 민은 무서워서 뛰어 달아났다. 그 처녀는 물론 위기를 모면하고 뛰어 달아났다. 그 이튿날 아침 신문에는『일본 순사가 괴한에게 살인되다』라는 기사가 났다. 민충식은 겁이 나서 숨었다. 하나 그는 그 순경을 죽이자던 것도 아니다. 그자가 누구인지, 그 처녀가 누구인지 얼굴조차 모른 채 오늘날까지 자기의 살인사건을 비밀에 붙여 왔다는 얘기다.
이와 같은 열혈 청년들이 YMCA안에 우글우글했다. 3백여 명 청년회회관 학생 중에도 많았고 80여명 직원 중에도 많았다. 그들은「클럽」을 조직하여 둘씩, 셋씩 짝을 지어 이상재의『동포여 경성하라』라는 연설 내용을 전단으로 인쇄해 가지고 각 학교와 가가호호를 찾아다니며 뿌렸다. 그리고 청년회관은 마치 풍자극을 연출하는 극장으로 화했다. 각본은 이상재가 쓰고 해석은 각 교회목사들이 했다.
이것을 보고 한 미국인은 이렇게 보고했다.『미국의 유명한 극작가이며 배우인「조셉·제퍼슨」은 일찌기「무대는 그 시대와 사회와 문화를 표현하는 장소」라고 말했는데, YMCA회관이야말로 한국민족의 심리상태를 잘 표현하는 극장처럼 됐다』고 말했다. 즉 청년들은 초혼·미신·양반 등을 풍자할 뿐 아니라「이스라엘」민족의 해방사를 기록한 출애굽기를 소재로 해서 연극을 하므로 밤마다 Y강당은 만원을 이루었다. 거기서 노래도 하고, 나팔도 불고, 울기도 하고, 광대 짓도 했다.
참말로 그 당시 YMCA는 구경거리였다.『버섯의 온상처럼 납작한 초가들이 깔려있는 속에 거물처럼 서있는 YMCA회관』에 쑥 들어가 본즉, 상급학생들이 신학문배우는 모습, 공업부 학생들이 양철 두드리는 소리, 나무 깎는 소리, 선반 돌아가는 기계소리, 유도부원들이 꽝꽝 메치는 소리, 운동장에서 군사훈련을 하며 호령하는 소리, 강당에서 열변 토하는 소리, 남녀가 함께 모여서 토론회 하는 모습 등이 다 구경거리였다.
YMCA회관 안에서만 아니라 해마다 운동대회는 훈련원(지금의 서울 운동장자리)에서 열렸는데『시내의 모든 기독교학교 학생들이 각각 천막을 치고 깃발을 날리면서 운동경기를 했다. 그것은 마치「예일」대학 대「하버드」대학의 축구대항전을 방불케 했으며, 그 축제분위기는「루터」공원이나「코니·아일랜드」를 방불케 했다』고 어떤 외국인은 얘기했다. 이것이 즉 한국청년문화의 발상지가 아니겠는가?
한편 이승만은 1921년3월26일 그가 의식했는지 못했는지는 모르나 바로 그의 생일에 귀국한지 1년 반도 못되어 다시금 뛰어 달아났다. 하나 그는 도망치면서도 청년들을 선동했다. 즉 그는 동경에 들러서 일본유학생들을 만났다.『그 당시 5백9명의 유학생 중 2백13명이 기독교신자가 되었으며, 대한흥학회보의 주필을 비롯하여 대한흥학회의 회장 부회장과 그 회원들의 거의 전부가 기독교신자가 된 것은 재일 한국YMCA의 활동 때문이었다.
이YMCA는 구 한국공사관 집을 무장으로 대여 받아 가지고 사업을 하고있었다.』
이승만은 우선 여기서 한국유학생들을 만나 일대 열변을 토했다. 그리고「가마구라」에 내려가 조선유학생대회를 개최했다. 그 결과 1백67명이 1천3백65환이란 회관건축 기금까지 희사하게 됐다.
이때 학생들의 반일 감정은 극도에 달했었다. YMCA마저 일본YMCA와 합병된다는 소문을 듣고 학생들은 극도로 흥분했다. 학생들만 아니라 김정식 총무와 최상호 간사가 더 앞장을 섰다.
또 그들은 한국에 있는 중앙YMCA에 대하여 경고하는 동시에 이승만의 방문을 계기로 하여 일본 YMCA간부들에게 노골적으로 항의를 했다.
이때에 가장 입장이 곤란했던 사람은 일본에 주재하고 있던 미국인 YMCA간사「펠푸스」였다. 그는 사태를 중시하고 다음과 같은 편지를 YMCA국제본부에 썼다.『틀림없이 최상호는 일본경찰이 금하는 책자를 재동경 한국유학생들에게 뿌렸습니다. 그는 그 책자를 Y회관에다 보관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 사실이 드러나면 그와 김정식 총무는 영락없는 징역감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에게 봉급을 주는 한국YMCA의「질레트」총무와 YMCA 국제위원회의「마트」총무는 무사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빨리 서둘러서 그들을 동경에서 떠나도록 해야합니다…최는 2년 전에 미국 가는 여권을 받았습니다. 돈이 들더라도 그를 빨리 일본 국토에서 떠나도록 하십시오,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가 누명을 쓰게 됩니다. 우리는 평소에 한국YMCA와 일본YMCA가 합병되는 것을 권고해 왔으므로 만약 그들이 잡혀가면 우리가 경찰에 밀고해서 잡혀갔다는 오해를 받게 됩니다. 빨리 손을 써서 그가 잡히기 전에 미국으로 데려 가십시오』했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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