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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 문제, 법 말고 시장에 맡겨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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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임금문제를 법으로 강제하면 안 된다. 노사 자율의 원칙을 지키고, 시장에 맡겨야 한다.”

 임금체계 개편에 관한 노사정 논의를 앞두고 한국노동법학회(회장 박수근)가 제도 변경에 따른 5대 원칙을 제시했다. 10일 서울 중구 명동 은행회관 국제회의실에서 열린 한국노동법학회 학술대회에서다. 이날 제안된 원칙은 향후 관련 법 개정을 둘러싼 노사정 논의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고려대 박종희(노동법) 교수는 ‘임금제도 개선의 입법정책적 과제’라는 발제문을 통해 “통상임금의 대법원 판결은 그동안의 잘못된 임금제도에 대한 입법적 개선을 추진할 수 있는 호기”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60년 동안 바뀌지 않은 임금지급 기준부터 고쳐야 한다”고 말했다. 1953년 제정된 근로기준법은 임금을 근로시간에 따라 지급토록 하고 있다. 갈수록 성과와 직무에 대한 비중이 커지고 있는 현 경제상황과 맞지 않는 규정이다. 일하는 개념이 양(근로시간)에서 질(성과와 직무)로 바뀌었다는 얘기다. 따라서 임금도 근로시간만 따져 지급하는 경직된 구조에서 벗어나 성과에 따라 임금을 다르게 줄 수 있는 방향으로 수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용·노동과 관련된 법은 ‘시장경제질서 존중’이라는 기본 명제에 부합해야 한다”는 원칙도 내놨다. 법은 최저임금이나 퇴직금 하한선과 같은 최소한의 보장 기준만 강제해야 한다는 뜻이다. 임금을 포함한 구체적인 근로조건은 노사 당사자들이 합의해 정하고, 법은 이를 유도할 수 있는 지원책을 담도록 권했다.

 박 교수는 특히 “근로기준법으로 적정한 시장의 모습을 만들려는 시도를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법이라는 강제수단을 동원해 인위적으로 특정한 형태의 고용시장을 만들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고용시장을 왜곡하고, 본래 입법취지마저 훼손할 수 있어서다. 예컨대 근로시간을 단축하면 모든 근로자에게 혜택이 돌아갈 것 같지만 실제로는 대기업 정규직에서만 그 효과가 나타나고, 중소 영세사업장의 근로자나 비정규직은 별다른 혜택을 보지 못한다. 사회 양극화만 심화시킬 수 있다는 말이다.

 법적 규제에 따른 부작용을 없애려면 기업별 특성을 충분히 고려하는 개선책이 나와야 한다. 박 교수는 “개별 사업장마다 근로조건이 다양하다. 따라서 법의 잣대로 획일적으로 노사의 판단을 제어하면 안 된다”며 “노사 당사자의 합의에 따라 실정에 맞는 유연한 임금체계를 가질 수 있도록 여지를 만들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통상임금의 경우 근로기준법에 ‘당사자 합의를 우선시한다’는 규정만 있었어도 지금과 같은 혼란은 없었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대법원이 ‘상여금을 통상임금에서 제외키로 한 노사합의는 무효’라는 판결을 내린 것도 이런 노사자율 규정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박 교수는 “오랜 기간 지속된 임금제도를 다룰 때는 기존의 틀에서 노사가 형성해온 결과를 존중하는 자세가 필요하고, 이를 뒷받침하는 정책이 뒤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 김대환 위원장은 10일 서울 공덕동 한국산업인력공단에서 열린 노사정 신년인사회에서 “올해 임금체계 개편, 근로시간 단축과 같은 고용 현안에 대한 노사정 대타협이 이뤄지지 않으면 사퇴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신년회에는 전·현직 노동부 장·차관과 노사단체 관계자 등 300여 명이 참석했다.

김기찬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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