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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제6화 가장청정의 볼모 일요상인 서한(4)|제2장 일본 속에 맺힌 한인들의 애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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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가등청정을 마치 인자스런 성품의 덕 장처럼 꾸미려는 억지춘향 제2막은 말 못하는 짐승 원숭이까지를 동원했다.
비후본묘사 경내에 있는 이른바 『논어원』이란 석상이 바로 그것인데, 일본인들 가운데는 꽤 많은 신봉자가 있는 모양이다. 돌로 만든 원숭이 상을 세워 놓고, 그 앞에 큼직한 제석을 따로 마련, 참배자들이 생화와 공물을 하게 되어 있다.
여자들 신봉자들 가운데는 친절하게도 옷을 만들어 입혀준 사람도 있어, 울긋불긋한 천을 감고 앉은 원숭이님(?)의 의젓한 모습은 절로 고소를 금치 못하게 한다.
비후본묘사에서 발간하고 있는 「팜플렛」에 실린 이 원숭이의 내력은 이러한 것이다.

<법화 빌은 논어 원 내력>
『어느 날, 청정공이 논어를 읽으시면서 주필을 들어 구독 점을 찍고 계셨다. 그러다가 공이 잠깐 자리를 뜬 사이, 평소부터 기르고 있던 원숭이가 청정공의 흉내를 내려고, 그 주필을 들고 온통 책 한 권을 모두 붉게 칠해버렸다. 자리에 돌아온 공께서는 그 원숭이를 나무라시기는커녕, 도리어 칭찬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옛날 중국 고사에도 절에서 키우던 원숭이의 참선하는 얘기가 있느니라. 주승이 잠깐 자리를 뜬 사이, 이 원숭이는 가사를 입고 그 중이 하던 대로 바위 위에 걸터앉아 좌선하는 흉내를 낸 일이 있는데 이걸 본 다른 원숭이들도 모두 내 참선을 하게 되었다. 이래서 원숭이들은 소선의 공덕을 쌓은 것이 되어 성불하게 되었다….> 내가 기르는 이 원숭이도 비록 장난질을 해서 논어 책을 버려놨으나 그 흉내내는 모양이 성현의 길에도 조금은 통하는 데가 있지 않겠느냐. 그러니 이 원숭이는 도리어 상을 받을만한 짓을 한 것이로다….』
이 얘기는 실상 법화경에 나오는 법화한 대목을 옮겨 놓은 것임을 알 수 있다. 법화경에 보면, 어떤 어린이 하나가 모래장난을 하면서 모래 불탑을 쌓은 일이 있었는데, 그 아이는 나중에 이 소선의 공덕으로 성불할 수 있었다는 얘기가 실려있는 젓이다.
청정을 모신 비후본묘사는 그래서 이 원숭이의 얘기를 청정공의 인자스런 덕행과 관련된 우화로 둔갑시킨 것이다.
말 못하는 짐승에까지도, 너그럽고 인자스런 성품이 미쳐 성불할 길을 가르쳐 주었으니, 그 청정공의 덕이 얼마나 높고 큰 것이냐를 말해준다는 것이다.
『인자스런 평화주의자로의 청정공』을 부각시키려고 한 셋째번 「넌센스」는 명백한 역사의 위조행위라고 할 수 있다. 『적지인 조선에 출전해서도 항상 인자스런 덕행을 잃지 않으셨던 청정공은 포로가 된 두 조선 왕자를 잘 보살펴 부왕 앞에 무사히 돌려보내셨다』는 일화가 바로 그것이다.
가등청정이 포로로 잡은 조선 왕자의 얘기를 알아보기 위해 잠시 임진난 때의 역사책을 들춰 보기로 하자.

<2왕자 포로 경위 밝혀>
우선, 신단학회가 펴낸 『한국사』(근세전기 편)에 나오는 서술은 이렇다.
-『소서행장의 군이 평안도 방면으로 북상하여 6월13일(임진년·선조 25년·1592년) 평양을 점령하고, 이를 지키는 동안 가등청정의 군은 곡산으로부터 안변을 거쳐 함경도 방면으로 질구하여 6월24일에는 영흥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근왕병을 모집하러 함경도로 갔던 왕자 임해군(봉)과 강원도로 갔던 왕자 순화군(각)이 모두 함경도에 도피해 있다』는 말을 듣고…북상을 계속하여, 상량 뢰방(주=왜장)에게 그 뒤를 따르도록 하였다. 북 병사 한극성은 육진의 병을 이끌고 해정창(현 성진 부근) 에서 회전하였으나…마침내 궤패하여 가등청정은 그 길로 회령에까지 이르렀다. 그때 2 공자는 단천 마천령을 넘어 회령에서 수개월을 유하고 있었는데, 부사 국경인은 일군이 내습하자 스스로 2 왕자와 종신…등 수십명을 오랏줄로 묶어 투항하니 7월22일의 일이었다.
가등청정은 이들을 경성으로 옮기어 지키게 하고, 수비병을 남긴 뒤 「우라할」의 땅(현 문도생국자가 부근)에 들어가 몇개 성을 공략, …북 병사 한극성도 이곳에서 잡히게 되었다. 경성으로 돌아온 가등청정은 길주 이북의 수비가 어려움을 알자…2왕자를 동반하여 안변으로 돌아왔다….
한편 그 이듬해(계사년·선조 26년·1593년) 4월18일, 왜군이 서울 철수를 시작하던 날, 심유경(명장·임란 때 명나라 유성 장군으로 조선에와 왜군과의 강화에 뛰어난 솜씨를 발휘했음) 은 명사 사용수·서일관 등 양인과 같이 서울에 이르니, 소서행장과 석전삼성(양언 모두 왜장) 은 이들 사절들과 함께 일본으로 향하여 5월15일 비전 명족면(북구주 현 장기현에 있던 임란 때 왜군의 본영)에 도착, 그 달 23일 풍신수길과 만나게 되었다.

<명과 강화 때 미끼로써>
풍신수길은 소서행장·석전삼성 등에게 화약의 조항을 의론케 하고, 마지막으로 「7조목」을 정하여 심유경 등에게 주어 내등여안과 같이 명에 들어가게 하고, 심유경이 돌아오는 6월에 부산에 역류 중이던 조선의 2 왕자와 그 종신들을 반환하였다….』
약간 긴 인용을 했으나 우리 역사책에 기록된 가등청정의 조선 2왕자 포로의 경위와 그 석방 이유는 이로써 대체로 명백하다. 즉 조선에 출전한 1번 대에서 9번 대까지의 왜군 중 32명의 대장가운데서도 가장 저돌적이었던 2번 대장 가등청정은 동료 장수들의 만류를 무릅쓰고 함경도까지 북진, 근왕병을 모집키 위해 그곳까지 가 있던 두 왕자를 사로잡게 된 것인데, 그것도 그때 그곳에 귀양가 있던 부평 분자 조선인 관원을 금품으로 매수하는 간사스런 계략을 썼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청정은 그렇게 해서 사로잡은 두 조선 왕자들을 경원·경성·길주·안변 등지로 끌고 다니며 인질로 가둬두고 있다가 1년 뒤 명과의 강화 담판을 벌이는 미끼로서 이들을 이용하려고 했음에 불과하다.
앞서 말한 풍신수길의 소위 강화 『7조목』이란 그가 일방적으로 만들어 낸 황당무계한 강화 조건들이다.

<역사적 사실 위조까지>
즉 임진·정유란에 관한 일본 측 기록 문서인 이른바 『모리문서』에는 그 일곱 가지 조건으로 다음과 같은 사항이 기록돼있다.
①명나라 황녀를 일황의 후궁으로 삼게 할 것.
②감합인 (감합인=통교무역에 있어 해적선이 아니라 정당한 교역선임을 명나라에서 증명해주던 일종의 증명서 제도) 을 다시 발급해줄 것.
③명과 일본의 대신들이 서로 서약서를 교환할 것.
④조선 8도 중 4도를 일본에 할양할 것.
⑤조선의 왕자와 대신 1, 2인을 인질로 보낼 것.
⑥그 대신 볼모가 된 조선 2 왕자를 돌려보낼 것.
⑦조선 대신들에게서 일인을 제쳐놓고서 명나라와 맹약을 않겠다는 서약서를 받을 것.
일본측 문서에만 기록돼있는 이 같은 조건들이란 실상 역사적 사실마저를 위조하기 좋아하는 일인들의 버릇을 잘 나타내준 것이기만, 요컨대 조선 2 왕자의 보호와 그 반환이 결코 가등청정의 덕행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것만은 확실히 해주고 있다.
그리고 이 사실은 다음의 일본인 저서를 통해서 보면 더욱 명확히 나타난다. <계속>

<차례>
제2장 일본 속에 맺힌 한인들의 원한
제5화 북해도 한인위령탑의 엘레지
제6화 가등청정의 볼모 일요상인 서간
제7화 신률도의 성녀 오다·줄리아
제8화 포로학자 정희득의 우수
제9화 고균 김옥균의 유랑행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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