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진보』와 혼동 말아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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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손보기 교수가 고문진보대전 잔본의 가치를 인정하여 과학적인 연구를 한끝에 그것이 1160년대에 고려에서 금속 활자로 인쇄된 것임을 추정하게까지 되었다. 금속 활자 제작 사용의 기원을 수세기 끌어올리는 작업이 되므로 그 의의가 지극히 크다.
우리 학계의 일부에서 이러한 작업이 끈질기게 추진되고 있다는 것은 대단히 고마운 일이다. 손 교수가 제시한 결론이 학계에 받아들여져 정설이 되어질 날이 빨리 오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다만 정설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손 교수가 앞으로 더욱 많은 시련을 감당해내야 하므로 우리는 그를 위해 응원과 협조를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지난번 한담 끝에 생각나는 대로 기억을 더듬어서 한말이 일부 신문에 보도되어 마치 손 교수의 주장에 대결하고 나선 것 같은 인상을 자아낸 것은 필자의 본의가 아니다. 다만 손 교수의 그러한 연구가 국제학위 계에서 정설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우선 국내의 비전문가의 의문도 여온 없이 풀어줄 수 있어야 되겠다는 뜻에서 「고문진보」와 「고문진보대전」이 혼동되어 다루어져서는 안될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 것이다.
뚜렷이 서명이 다르고, 각종 목록에도 「고문진보대전」에는 황견의 이름이 제시된 것이 없다. 지난번 언급한 명 엽향고의 「고문진보대전」은 정확히는 「고문대전」이다. 고문진보를 다룬 것에는 틀림없다. 필자가 본 각종 목록에서 시대가 가장 이른 「고문진보대전」의 저자는 진량 (1252∼1334) 이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잔본 「고문진보대전」의 연대를 고증하는 작업은 기지의 「고문진보대전」의 저자와 그 간행의 연대를 토대로 해서 전개해야지 그것을 비약해서 「고문진보」의 저자인 황견만을 언급하고 마는 것은 완미한 방법으로 받아들여지기에는 허약하다.
또 한가지 생각나는 것은 손 교수가 「고문진보」는 황견이 북송 때 만든 것이라고만 말하고 그것을 고증하지 않은 것은 다분히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고래로 우라 선비들은 고문진보의 저자 황견을 북송의 황정견 (자호산곡·1045∼1105)으로 보아왔으나 그 신빙성은 극히 희박하다. 고문진보에는 황정견의 후배들의 글이 많이 실려있다. 각종 판본을 두루 살펴보면 고문진보의 저자는 송황견으로 되어있는 것이 대부분인데 그것이 북송인지 남송인지 분명하지 않다.
그 중에는 원황견으로 되어있는 것들도 있다(경도대학 문학부 한적 분류 목록 제일 일삼삼상에 원황견으로 되어있는 것이 두 가지 있다).
동일인으로 그 생존 조대명을 송 또는 원으로 한 것은 남송(1127∼1279) 후기와 원대 초기에 그 사람이 생존했을 가능성이 짙다. 앞에 든 진량의 경우도 생존 조대명이 송 또는 원으로 되어있는데(고해책보) 그의 생졸 년대를 보면 원 쪽으로 치우쳐 있기는 하나 남송에도 걸려 있어 그 좋은 예로 들 수 있다.
황견의 생졸년대는 알아볼 길이 없으나 위와 같은 사례와 아울러 제가의 고문진보의 서발을 참고하면 그가 남송 후기의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만약에 이러한 가능성이 부정될 만한 충분한 고증이 시도되지 않으면 손 교수가 잔본 「고문진보대전」의 연대를 1160년대로 내세우기는 힘들게 된다는 얘기가 된다. 「고문진보」를 황견이 세장에 내놓기도 전에 고려에서 「고문진보대전」을 금속 활자로 찍어냈다고 주장한다고 여겨지게까지 될 우려가 전무하지 않다면 우스운 일이다.
이러한 한두 가지 비전문가의 의견이 손 교수의 활자 연구에, 또는 잔본 년대 추정작업에 한 가닥의 성원과 협조의 구실을 하여주기 바란다.
한가지 부언하고 싶은 것은 「이녕보장」인의 문제다. 서화에는 소장자인, 심지어는 서화가인까지도 위조가 얼마든지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 것에 대한 미련은 버려버리는 것이 짐이 가벼울 것이다. 【차주환 (서울대 문리대 중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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