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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충무로역 봉지할머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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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양성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양성희
문화스포츠부문 부장대우

얼마 전 지하철 을지로3가역 환승장. 사람들이 무언가를 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외마디 고성도 들렸다. 한쪽으로 지나치며 보니 남루한 행색의 노숙인과 그를 찍는 방송 카메라가 있다. 아까 고성은 자기를 찍지 말라는 노숙인의 항변이었던 모양이다.

 지하철에선 심심치 않게 노숙인을 만난다. 나만 해도 3호선에서 두어 번 만난 할아버지가 기억난다. 기골이 장대한 데다 나무 뿌리를 통으로 깎아 만든 것 같은 굽 높은 이상한 신발을 신고 있어 궁금증이 생겼다.

 아마 노숙인 중 가장 유명한 이는 지난해 세상을 떠난 ‘맥도날드 할머니’일 것이다. 2010년 SBS ‘궁금한 이야기 Y’를 통해 알려졌다. 트렌치 코트 차림에 영자 신문을 읽고 스타벅스나 맥도날드에 머물렀다. 대학을 나와 외무부에 근무했었다니 안타까워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할머니도 처음 취재진을 차갑게 물리쳤다. 한참 동안 취재를 거부하는 대목이 나온다. 방송을 보고 찾아온 지인들의 도움도 “내 방식대로 남은 생을 살겠다”며 물리쳤다는 그녀다.

 며칠 전 이 프로그램은 ‘충무로역 봉지할머니’를 소개했다. 비닐 봉지 10 여 개를 들고 10년 넘게 충무로역을 떠돈다는 할머니다. 그 사연이 궁금하다는 시청자의 제보로 시작됐다.

 할머니 역시 취재진을 거부한다. 찍지 말라며 손사래를 친다. 카메라는 주변 취재에 나선다. “유식하다”“대학도 나왔다더라” 같은 얘기가 나온다. 할머니의 옛날 집터도 찾아간다. 딱한 처지를 안타까워하며 도움을 주고 싶다는 지인들도 만난다. 할머니도 조금은 편해졌는지 “내 얼굴이 어떻게 나오냐”고 묻기도 한다.

 그러나 방송 내내 불편했다. 아니 화가 났다. 방송은 무슨 권리로 할머니의 인생을 저리 휘젓는 것일까. 그저 딱하다며 혀를 차는 것 외에는, 혹은 내 삶의 안온함을 확인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방송이다. 취재 허락은 받았겠지만 상대가 노숙인이 아니었더라면 저리 쉽게 개인사를 뒤적일 수 있을까. 이 프로그램뿐이 아니다. 방송은 종종 노숙인이나 서민들의 기막힌 사연을 보여주지만 그들만 기막힌 인생을 사는 것은 아니다. 그들 아닌 다른 힘 있는 사람들의 기막힌 인생은 방송이 보여주지 않거나, 보여주지 못할 뿐.

 프로그램 제목대로 누군가에게는 그저 궁금한 호기심거리일지 몰라도 누군가에게는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인생이다. 노숙인의 삶이라고, 그녀는 불행하니 동정해 마땅하다고 쉽게 말하지 말라. 이날 방송의 부제는 ‘충무로역 봉지할머니, 그녀의 집은 어디인가’였다. 그러나 그나마 있던 할머니의 집을 빼앗은 것은 바로 방송이었다. 방송 엔딩에도 나왔지만, 그녀가 충무로역을 떠났기 때문이다. 밖은 한겨울이다.

양성희 문화스포츠부문 부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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