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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4)<제32화>골동품 비화 40년(25)|박병래(제자 박병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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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위창 선생과 서화>누구나 고 미술품을 모으고 있는 동안에 그 범위가 점점 넓어지는 것이 보통이다. 서화의 수집을 시작한 이가 뒤에 도자기에 손을 댄다든지, 도자기를 모으는 동안에 목기도 갖게 된다든지 하는 식이 되어버린다.
나도 원래 도자기에서 출발하였지만 이어 서화에도 손을 뻗치고 말았다. 그러나 서화의 감정이란 도자기보다도 더 어려운 점이 많다.
특히 중국의 화가가 그린 그림은 더욱 어렵다. 우선 많이 보아서 그 작가의 특징이나 버릇을 멀리서도 알 정도가 되어야 하는데 우리가 중국의 것을 접할 기회란 그리 많은 편이 못되었다.
구한말에 학무 국장을 지낸 윤치오씨(윤일선 박사의 선친)가 중국의 서화를 사느라고 많은 돈을 썼으며 그 때문에 가산이 기울었다고 했는데 그 물건가운데 태반이 가짜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혹 중국의 서화가 나오더라도 보고 즐기는 것으로 만족하였지, 그 이상 물건에 대한 욕심을 안 부리기로 작정을 하였다. 그러나 여기에도 예의는 없을 수 없었다.
주로 위창 오세창 선생께서 틀림없는 물건이니 차지하라는 말씀이 있는 것에 한하여 갖기로 하였다.
한번은 위창 선생께서 연락하기를『좋은 물건이 있으니 박군이 차지하라』고 하였다. 그물건이란 어느 그림에 붙었던 발문이었다. 추사를 비롯한 당대의 명류들이 심취하였던 청의석학 담계 옹방강의 아들인 옹수곤이 시서화 삼절로 이름높던 자하 신위에게 요정목의 그림을 보내며 쓴 발문이었다. 글씨도 단아한 해서로 매우 고왔지만 글이 또한 절절하였다. 추운날 입으로 붓끝을 녹여가며 쓴다는 내용이 담긴 우정어린 글귀는 여간 흐뭇하지 않았다.
그런데 사실 나는 이 발문을 갖고있는 동안에 언젠가는 그 그림도 얻어지리라는 막연한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여러 해가 지나도 그 그림은 영영 구경할 수가 없었다. 어디서 어떻게 헤어졌는지는 모르지만 이 그림을 기다리던 나의 심정은 이산된 동기간을 그리는 마음과도 같았다. 이 사실이 나의 친구사이에는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난데없는 분에게서 이 글씨를 가졌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 순간 나는 내가 찾던 그림이 나왔구나 생각하며 흥분하였다. 그러나 결과는 역시 실망이었다. 그분이 상허 이태준의 글을 읽는 가운데 상허가 백자 수주의 뚜껑 하나를 가지고 그 짝을 찾으려고 무진히 애를 쓰다가 가망이 없어 뚜껑을 다른 사람에게 주어버렸더니 오히려 속이 후련해졌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상허는 이어 말하기를 내 친구 박 모도 글씨를 가지고 그림을 찾고 있으나 종내에는 그 글씨를 남에게 넘겨주게 될 것이라고 하였더란다.
이런 심정은 고 미술품을 모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밖에도 짝이 맞지 않는 물건을 많이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언제나 마음에 걸리는 것을 숨길 수 없다.
이야기가 좀 빗나갔지만 내가 가지고있던 서화의 태반은 위창 선생의 추천에 의한 것이었다. 선생은 서화감정에는 제1인자로 아무도 그분을 당할 수가 없었지만 자신은 매사에 조심하며 단정적인 평은 피하는 편이었다. 묻는 자가 그분의 말투에서 뜻을 알아차리는 도리밖에 없었다.
그런데 단 한번 단정적인 행동을 취한 일이 있다. 어느 어설픈 미술상이 위창 선생의 와당을 사서 그 진가를 가리려고 선생을 찾았다. 선생은 보자마자 그 와당을 찢어버렸다.
그 상인은 비록 가짜일망정 돈을 내고 산 물건인데 주인의 뜻도 무시하고 그대로 찢는 선생의 태도에 깜짝 놀랐다.
그러나 뭐라고 말할 처지도 못되어 그대로 보고만 있자니까 선생은 바로 그 자리에서 와당을 그려서 그 상인에게 주며 『이것이 내 와당이야. 그런 것도 모르고 어떻게 장사를 하지』 하며 웃었다는 것이다.
지금 인사동근처에는 위창 선생의 와당이나 전서의 모조품이 제법 나돌고 있지만 이런 일은 선생의 생전부터 있어오던 일이다.
위창 선생을 모시고 서화를 수집한 사람으로는 다산 박영철씨가 떠오른다. 호남의 큰 부자였던 그는 지금 경기고교의 정문 맞은편에 있던 넓은 터전을 사서 여러 채의 양옥을 짓고 여러 친구와 교유하며 세월을 보냈는데 위창 선생도 그 집에 출입하면서 감정을 해주었다.
그때 모은 서화를 수십 권으로 엮어 「근역서휘」란 이름을 붙여 가지고 있다가 서울대학교에 기증하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서울대학교에는 부속박물관이 생기게 되었으며 아직도 그곳에 잘 보관되어있다.
박영철씨는 그의 방조가 되는 연암 박지원의 필적도 많이 모았는데 그 뒤에 위창 선생의 권고로 『연암집』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한국이 낳은 문호라고 사랑하는 연암의 글이 세상에 행하여지게 된 데에는 이와 같이 선생의 공이 컸던 것이다.
간송도 물론 상당한 감식안을 가진 분이었으나 서화를 살 때만은 반드시 위창 선생의 의견을 듣고 난 다음에 결정하였다. 그래서 작자는 확실하나 낙관이나 자서가 없는 경우에는 위창 선생이 새로 제를 쓰는 일도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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